시인

글을 쓰면서 가끔 이런 의문이 생긴다. “이 글을 누가 읽을까?’ 혹은 ‘몇 명이나 읽어볼까?” 하는 것이다. 좀 뻔뻔스런 생각일지 모르지만 나는 내가 쓴 글을 되도록 많은 독자들이 읽어주길 기대한다. 그리곤 공상에 빠지기도 한다. “내가 쓴 글을 많은 독자들이 읽어보리라. 공감하고, 나아가 크게 감명을 받기도 하리라. 그리고 어쩌면 그런 독자와 대화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오리라!” 그러나 그런 나의 기대는 대개의 경우 공상에 그치고 만다.

욕심으로는 나도 보다 훌륭한 작가가 되고 싶다. 많은 독자들이 내 이름을 기억해 주고 내 글을 읽어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욕심일 뿐이고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나는 스스로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아주 가끔은 신문에 실린 나의 시를 보고 전화를 하는 친구가 있다. 어떤 때는 내가 쓴 칼럼을 보고 평을 해주는 분을 만날 때도 있고, 우연히 들른 시낭송회에서 낭송되고 있는 나의 시를 들을 때도 아주 간혹 있었다. 한번은 부족한 나의 시 작품 중 하나를 대학교 서예과 졸업 작품으로 썼다며 도록(圖錄)을 보내주신 분도 계셨다. 졸업 작품으로 쓰기 위해 수없이 서예 연습을 하며 내가 쓴 시를 읽고 또 읽었으리라.

그럴 때 나는 전율한다. “아! 내가 쓴 글을 읽어주는 분이 계시구나!” 하고 말이다. 그리고 다시 글을 쓰면서 좀 더 겸손하고 진지한 태도로 나 자신을 가다듬는다. “누군가 읽어 주는 분이 있다.”, “누군가 내 글을 읽으며 생각을 하시고 경우에 따라서는 내 글의 잘잘못을 지적해 주시는 분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생각이 좀 더 나은 글을 쓰게 노력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 같다.

대개의 경우 나는 내가 쓴 글을 먼저 가족에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딸에게 보여 줄 때도 있고 아내에게 보여줄 때도 있다. 그리고 가족들이 읽는 동안 조용히 기다린다.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고 궁금해 하면서 가족들이 읽고 고개를 끄덕이면 비로소 조금 마음을 놓는다. 그런 다음 절친한 친구에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친구 역시 고개를 끄덕이기를 기다린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혹시 표현을 잘못하지는 않았는지?”, “내용상 무리가 없는 것은 아닌지?” 하고 말이다. 친구에게 합격점을 받고나서야 겨우 원고를 투고할 용기를 낸다.

신문에 내가 쓴 글이 나오는 날이면 내 글을 기다리는 독자가 꼭 한 분 계시다. 바로 나의 어머니시다. 아흔을 코앞에 두고 계신 어머니는 내가 쓴 글을  꼬박꼬박 읽어주시는 애독자시다. 어머니는 한 달에 한 번 내 글이 실리는 금요일 아침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신다. 그리고 신문이 도착하면 바로 돋보기를 쓰시고 10분이고 20분이고 몇 번을 거듭해 읽고 또 읽으신다. 나는 어머니의 진지한 표정 앞에 자못 옷매무새를 가다듬을 수밖에 없다.

중학교 2학년 시절 아버님이 불의에 세상을 뜨시고 5남매를 홀로 키우시며 온갖 고난과 역경을 무릅쓰고 가족을 돌보아 오신 어머니! 어머니는 내가 쓴 글을 보시고 흡족해 하신다. “잘 썼다” 이렇게 칭찬해 주실 때가 많다. 어머니는 간혹 내 글의 내용에 대해 내게 질문을 던지실 때도 있고 나와 한참동안 대화를 나누시는 경우도 있다. 어머니는 내게 글을 계속 쓰게 하는 용기도 주시고 때로는 질책도 하신다. 그래서 나는 글 앞에 겸손해 질 수밖에 없다. 내가 쓴 글을 진지하게 몇 번을 거듭 읽어 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만으로 나는 앞으로도 글을 계속 쓸 충분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유명한 시인이나 칼럼니스트가 아닐지라도 내 글을 읽어 주시는 독자들에게 생각의 실마리를 갖게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한 편의 글을 쓸 이유를 갖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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