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 수필가, 전 충주농고 교장

‘사랑하는 내 조국이 붉은 이리에게 짓밟히던 그날! 맨주먹 붉은 피로 막아내며,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떨던 그날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나는 6·25의 노래 한 구절을 부르며 잊지 못할 그날의 울분을 되새겨본다.

우리민족은 36년간 일제식민지에서 해방이 되고,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 일본의 무장 해제를 명분으로 조국을 남북으로 갈라 미·소 군정(軍政)을 받게 되었다. 그때 생겨난 경계선이 38선이었다. 강대국이 그어놓은 38선. 우리민족은 운명의 선으로 숙명으로 받아드렸다.

남한에는 유엔의 결의에 따라 5·10총선으로 제헌국회가 개원됐고, 정부가 수립됐다. 북한은 유엔결의를 거부하고 김일성을 수상으로 추대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당시의 군사력은 북한이 우위에 있었다. 소련의 지원을 받아 소련제 탱크 240대, 전투기 170대, 병력 20만명이 넘었지만 북한은 병력증강을 숨기며 위장 전술로 일관했다. 반면 남한은 탱크, 전투기는 전무했으며 훈련기 20대 병력 10만에 불과했다. 남한사회는 지하조직을 통한 좌익세력인 남로당이 곳곳에서 분란을 일으켰다.

1947년 6월 어찌된 일인지 남한의 버팀목인 주한 미군이 철수를 했다. 그해 9월에는 북한 에 주둔한 소련군도 약속이나 한 것인지 철수를 발표했다. 더욱 놀라운 일은 1950년 6월 24일 자정, 국군은 그동안 유지해오던 비상 경계령을 해제하면서 농촌모내기 일손을 도울 것을 지시했다. 주말인 이날 군부대 병력 대부분은 외출한 상태였다. 남침의 기회만을 노리던 북한은 남한의 이 허술한 경계를 놓치지 않았다.

그날 새벽 4시 북한군은 ‘폭풍’ 이라는 공격명령과 함께 38선 전역에서 준비해온 T-34 소련탱크를 앞세우고 물밀듯 기습 남침을 했다. 그날 북한의 남침은 우발적인 도발이 아니었다. 적화야욕에 의한 치밀하고 계획적인 의도에서 은밀하게 진행해온 침략이었다. 그날 우리국군은 무방비 상태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러나 우리 국군은 용감하게 싸웠다. 침투하는 적의 탱크에 뛰어올라 수류탄을 던져 폭파하고, 맨주먹 붉은 피를 흘리며 막아 냈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이 이었다.

그날 북한은 선전포고도 없이 평화에 깃든 남한 동포의 가슴에 총을 쏘고, 못질을 하는 천인공노할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이 사실은 역사에 씻을 수 없는 민족의 반역자로 남게 될 것이다.

그날 북한의 남침으로 UN안보리가 즉시 소집되고 북한 남침을 부당한 침략으로 규정하고 ‘북한군은 즉시 38선 이북으로 철수하라’ 는 성명을 발표했다. 16개국이 위기의 한국을 돕자고 파병을 결의했다. 이로 인하여 한국전은 UN군과 북한군의 전쟁으로 비화 됐다. 그날 북한의 전쟁도발로 우리민족이 겪은 재앙은 상상을 뛰어 넘었다.

3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조국의 아름다운 산하와 국민의 삶의 보금자리는 폭격, 포격으로 황폐화 됐고, 한국, UN군, 중공군 등 군 장병 270만명의 인명피해와 이재민 370만, 전쟁미망인 30만, 전쟁고아 10만, 이산가족 1천만명. 이 엄청난 상처가 북한의 도발로 일어난 비극이다. 북한은 여전히 북침이라며 기회만 있으면 무력도발을 일삼고 있다.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싸워온 결과가 무엇인가. 우리민족이 숙명으로 받아드린 38선은 사라지고 언제 어찌 될지도 모르는 유동적인 휴전선이 생겨 제자리로 돌아온 것뿐이다. 휴전선을 경계로 60여년 남북을 가로막아 치유하기 힘든 민족의 비극, 각기 다른 체제로 사회적 이질화는 세월이 흐를수록 깊어지고 있다.

그날 일어난 6·25전쟁은 UN군과 중공군이 가담하여 국제전이 됐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간의 체제경쟁을 불러왔다. 특히 북한은 철저한 세습독제 정치로 선군 정치를 표방하면서 군비증강과 핵개발로 위협하면서 세계화시대를 역행하는 고립의 길로 질주하고 있다. 세계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없는 남북 분단 65년을 가져온 비극의 출발점은 그날의 북한군의 기습남침에 있다. 그런데도 최근 고교생의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63%가 6·25전쟁은 북침이라 답했다는 충격적인 발표가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역사인식을 바로 교육하지 못한 퇴직교사의 한사람으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6·25를 경험하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얼마든지 왜곡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매우 크다. 아무리 정권이 바뀌고 이념이 역사를 우롱한다 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6·25가 발생한 그날의 진실이다.

나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을 자꾸 중얼거려 보지만 그날에 당한 남침에 대해서는 할말을 잃게 된다. 왜 우리는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이 부족할까. 또 한번 당한 위기의식을 그리 쉽게 잃어버릴까 하는 생각에 한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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