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중국 무역 프리랜서

2008년 세계금융위기때 였던거 같다. 환율이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인민폐 1원이 한화 135원 정도 하던 것이 180원까지 올라갔다.

중국물건을 한국으로 수입하는 업체는 비상이 걸렸다. 대부분의 소무역상들은 무역 마진율이 자신만의 특별한 노하우가 있지 않은 제품이라면 10%내외가 관례인데 환율자체만으로 30%이상 올랐으니 바이어가 계약 수정을 해주지 않는다면 한국으로 물건을 보내면서 20% 이상의 손해를 떠 안게 된다. 필자 역시 한국으로 물건을 보내고 있었기에 많은 생각들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다.

그러다 생각 든 것이 반대로 한국에서 물건을 들여와 중국에서 팔면 환율만으로도 많은 이익이 생기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떠올라 곧바로 중국내수에 성공한 선배들을 찾아가 물었다.

하지만 그 노하우를 어찌 쉽게 알려 주겠는가? 자주 찾아가고 밥 사주고 술 사주고, 알고 보니 중국 내수에 성공하신 사장님 들은 공통적인 부분이 있었다. 우리가 쉽게 알고 쉽게 다니는 지역이 아닌 중국의 내륙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였다.

중국은 서부대개발사업(국가의 균형 발전을 위해 천문학적인 자금을 들여 서쪽의 낙후된 지역을 발전시키고 서쪽의 천연자원을 원활하게 공급 받기위한 중국 최고의 국책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있다.  서부의 도시 뿐 만아니라 서쪽으로 가기위한 거점 도시는 많은 발전을 이루고 있다. 교통량과 인구유입 물동량도 거점도시를 중심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기 때문에 사천성의 성도나 중경, 섬서성의 시안, 하남성 정주, 호북성 무한, 호남성 장사 같은 도시가 많은 발전을 이루고 있고 아직까지 한국의 무역상들에게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다.

필자는 사천성의 성도를 선택했다. 미지의 땅인 사천성의 성도 도매시장을 찾아서 기차에 몸을 실었다. 필자가 살던 절강성 이우에서 성도까지는 기차로 33시간. 상상이 되지 않는 시간과 거리였지만 새로운 사업에 대한 희망과 기대로 가득차 있었다. 기차는 침대칸과 의자칸으로 돼 있는데 침대칸을 선택했다. 한나절쯤 지나니까 외국인이라는 생각도 별로 잘 안 들었다. 저녁에는 도시락에 싸구려 중국 고량주라도 한잔 들이키고 한국음악을 크게 틀어서 듣고 있으면 왠지 모든 것이 감성적으로 보였다.

간이역에 서면 동네 상인들이 기차 주변으로 모여들어 계란이고 술이고 도시락 파는 모습들도 아이에게 밥을 먹이는 평범한 부모도, 허기진 배를 컵라면으로 때우는 배고픈 청춘들도 모두 드라마의 한장면처럼 느껴졌다. 하루하고 반나절을 지나서 오후쯤에 성도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낯설지만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낄수 있었다. 무지에서 나오는 단순한 편안함 같았다. 숙소를 잡고 내일일을 생각했다. 어차피 걱정을 하는 스타일이 아닌 필자는 내일 부딪쳐 보면 알겠지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여러가지 준비를 했지만 가장 핵심적인 품목은 벽지와 악세서리였다. 첫날은 벽지 위주로 조사를 하는데 벽지는 아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무게가 한권에 10kg정도 되는데 2권을 가지고 미지의 도매시장에서 일면식도 없는 중국인들에게 영업을 하는 것이 어찌 쉽겠는가? 그러나 뜻이 있으면 이루어 진다고 했는가? 처음에는 업자들이 대부분 제품은 좋지만 비싸다고 그랬는데 마지막으로 간 업체를 찾아간 순간 필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전시장이 3천300평이고 제품전시장에는 여러개의 드라마 세트장처럼 커텐이나 벽지를 활용해 방을 꾸며 놓았다. 그쪽 사장이 필자에게 말을 건다.

“여기까지 어떻게 (찾아)왔어요?” 필자가 사장에게 농담을 건넨다. “기차타고 왔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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