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사(私)적인 명분이 잘못되면 자랑하는 꼴이 되고 공(公)적인 명분이 잘못되면 희생을 정당화하기가 쉽다. 그래서 명분(名分)을 세울때에는 반드시 낮은 곳에서 살피고 높은 곳에서는 맑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누구나 외물(外物)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외물을 오래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있으며 자신에 대한 성취의 욕망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루고 싶어 하는 마음이야 간절하다고 하더라도 마음만이 무성할 뿐이고 세상의 이치에서 벗어나 있는 일들은 어느 것 하나라도 제대로 이룰 수가 없다. 천체는 구성(九星)으로 인체는 구령(九靈)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운명에는 아홉 기둥에서 아홉의 도리가 있을 때에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어찌 아홉 기둥이 모두 순탄하기만을 바랄 수가 있을까? 그것도 욕심이다.

소년에서야 부모님 덕으로 삶의 형태가 바뀌는 것이고 중년에서의 삶이야 재산운, 건강운, 권력운, 명예운 들이 도토리 굴러가듯 제각각 구르면서 흐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말년에서야 중년에서 제각각으로 놀던 운들이 언제 약속이라도 하였던 것처럼 한 구명으로 다시 모여드는 구나! 이와 같음을 옛 성현께서 말씀을 하셨으니 도(道)에서 하나가 생겨났고 하나에서 둘이 생겨났으며 둘에서 셋이 생기고 셋에서 다시 만물이 생겨났다고 하셨다. 사람이 올 때에는 도(道)의 한 구멍을 통하여 왔고 차츰 보고 듣는 것들이 많아지면서 생가마저도 제각각이니 중년에서 노는 것들도 모두가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말년이 되면 그 사람이 어디에서 놀았던지 무엇을 가지고 놀았던지 무엇 때문에 놀았던지에 관여하지 않고 응당히 도의 한 구멍을 통하여 다시 가야할 지니 운성(運性)이 비좁은 곳에서 노니는 것도 응당히 그러하리라. 그래서 세상의 변화란 참으로 묘(妙)한 것이다. 태어날 때에는 아름다웠더라도 나날이 추하여 지는 것들도 있고 태어날 때에는 추하였더라도 나날이 아름다워지는 것들도 있다. 이처럼 변화가 무상한 운명에서 모든 것들은 잠깐을 머무는 것이고 모든 것들이 잠깐을 머무는 곳에서 사람의 생명도 덩달아 잠깐을 머물다가 가는 것이다. 이렇게 잠깐을 머물다가 가는 인생에서 스스로가 지킬만한 것을 지키고 구(求)할 만 한 것을 구(求)하거나 이룰만한 것들을 노력을 할 때에 자신의 운명을 좋은 운(運)으로 바꾸는 스스로의 개운법(開運法)이 되는 것이다.

한편, 재물을 구(求)하려고 정신을 놓다보니 육신은 어느새 지쳐가고 마음은 헤아릴 길이 없어지며 영혼은 혼동의 연속이다. 이렇게 마음과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이 어떻게 제 육신인들 온전히 보존을 하오리까?

어느 날 밤 정다웠던 옛 친구가 찾아와서 속삭이듯 유혹하는 한 마디에 선악(善惡)을 구분할 겨를도 없이 어둠의 사자를 따라 나서는 것처럼 발길을 옮기는 것이다. 마치 유리조각을 등에 지고 밤길을 걷는 영혼의 나그네처럼 상처뿐인 육신과 황폐해진 영혼을 가지고 혼돈(混沌)의 시간으로 자신을 끌고 가야만 할 것인가? 그러다가 문득 한 점의 빛줄기에 자신의 영혼을 깨닫고 돌아가려고 하더라도 이미 때가 늦었고 시간이 없다. 그래서 사람이 ‘으앙’을 외치면서 홀로이 태어났을 지라도 천지간의 이치에서 태어났으니 생(生)의 운명도 천지간의 이치속에서 꾸려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갈 때에는 “신음소리조차 없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천지간의 이치에서 명(命)을 받드는 바가 될 것이니 이치에 순응을 하는 마음이라야 가는 길에서 고됨이 적으리다.

이로써 이치 가운데에서 고요와 편안함이 머물고 복(福)과 길(吉)됨이 자라나며 이웃들과 함께 노래하는 즐거움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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