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교수

세상의 일이란 다하여 끝남이 없다. 끝남처럼 보여 질 뿐이고 그 끝은 새로운 의미에서의 시작이 되고 시작도 시작처럼 느껴질 뿐이지 그 시작도 다른 의미에서의 끝남이 된다.

이제는 천명(天命)을 받았으니 “모든 것이 끝이구나.”하고 돌아서면 새로움으로 시작을 한다. 이제는 명(命)을 받들었으니 “이제는 한 숨을 돌려야 하겠구나.”하고 돌아서면 더 큰 산이 앞에서 기다리는 것과도 같은 것이 운명의 곡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왔던 것들이 제 할 일을 다 하고 나면 갔던 것들이 또 다른 모습으로 시작을 하고 그렇게 끊임없이 함께할 것 같았던 만남도 세월과 함께 서로가 떠나간다. 또 이제는 어차피 헤어졌던 사람이려니 하고 마음에서 영원의 공간으로 보내려고 하면 자연의 이치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운명은 희비(喜悲)의 쌍곡선을 그리면서 희망과 슬픔과 기쁨과 실망과 즐거움으로 찾아와 그 오묘함을 다 할 날이 없으니 잠깐의 뒤에서 생겨나는 일일지라도 헤아릴 수가 없고 내일이나 그 이후의 일은 더욱 캄캄할 따름이다. 그러나 생명은 생겨났고 생겨난 생명은 성장을 할 것이고 성장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겪어야 하는 필연의 생명이 있다. 그리고 성장을 한 것에서는 언젠가 결실을 거둬야 하겠지만 결실이 없더라도 소멸의 명(命)을 피해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부서진 곳에서 또 다시 만들어지고 만들어진 것은 언젠가 부서져야만 하는 과정 속에서 생멸(生滅)의 법을 따르고 굴신(屈伸)의 법을 따르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요 이치가 된다.

예를 들면 멸(滅)의 과정에서 머무는 나그네가 이것이 마지막 시련이려니 하는 희망을 가지지만 바닥은 끝이 없다. 그래서 멸(滅)의 과정에서는 무엇을 구하려고 애태우기보다도 고요하고 차분하게 자신을 유지시켜야 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다. 이때에도 시간이 없고 세월이 안타깝다고 생각을 하여서 자꾸만 새로운 일을 벌이는 사람은 그때부터 세월의 허상에 말려드는 꼴이 된다. 그래서 기다림은 지혜 중에서도 가장 고요한 지혜요 묘안 중에서도 가장 한가로운 비결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생(生)의 과정에서 머무는 나그네라면 어찌 할까? 이곳도 또 다른 어둠이려니 하고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주어진 일에서 차분하고 고요히 진행을 할 때에 좌절의 언저리에서 비추는 서광이 운성의 이치가 되고 운명이 되는 것이다. 마치 유순한 암말이 수렁에 빠져서도 지나치게 발버둥을 치지 않고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다가 지나가는 나그네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빠져 나오는 것과도 비유를 할 수가 있다.

여기에서도 세월과 운명의 묘(妙)가 작용을 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묘리를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즉, 한 시각을 먼저 출발하여 화(禍)를 당하는 일도 있거니와 한 시각을 늦게 출발하여 화(禍)를 당하지 않는 일도 있다. 또 한 시각을 먼저 출발하여 복(福)을 구하기도 하거니와 한 시각을 늦게 출발하여 복(福)을 구하지 못하는 일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세월과 운명에는 오묘한 함수 관계가 설정이 되어 있다. 한 시각을 버티지 못하여 나그네를 만나지 못하는 야생마의 슬픔과 유순한 암말이 한시각을 버텨 나그네를 만날 수 있는 기쁨에서도 운명과 세월의 함수관계가 있는 것처럼 세월과 운명은 공회(公回)를 함께 하면서 어제와 오늘 그러므로 내일을 공평(公平)히 하고 상하좌우를 공평히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나간 과거에서 나를 나쁘게 하였던 사람에게 스스로가 멸하고자 애쓰지 않아도 때가 이르러 그가 자멸(自滅)을 하는 것이요 지금의 현실이 비록 어렵더라도 자신의 운성을 지키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서 성실한 자세로 임할 때에는 때가 이르러 발복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멸(自滅)을 하는 것과 발복(發福)을 하는 것도 가는 세월을 잡을 길이 없는 것처럼 하늘의 이치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자연(自然)의 섭리를 적절히 순응하면서 생활하는 태도가 스스로의 광명(光明)을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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