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숙 수필가

   

빠름이 미덕인 세상이다.

더디고 느리게 돌아가는 것들은 죄악이 될 정도다.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걸어 온 길을 바라보며 숨 고를 새도 없이 여유의 시간을 도난당하고 있다.

그 도난의 시간을 잠시나마라도 되찾는 방법 중 하나가 여행이다.

어느 날 그 여행 초대장을 선물로 쥐고 과감히 열차에 몸을 싣는다.

느림의 시간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는 방법은 기차여행이다. 이곳엔 고속도로에 한꺼번에 몰려나온 나들이 차량이 만든 교통체증도 없다.

이변이 없는 한 약속한 제시간 도착역에 당도하며 옛 정취 속 감성기행을 부추긴다.

이제는 사라진 완행열차처럼, 서두르는 법도 없이 임시 관광열차는 간간히 열차 안내 방송과 이벤트도 진행하며 남도여행지를 향해 고른 기차 쇠바퀴 굉음을 낸다.

앞 좌우 좌석에는 내 바로 전 역에서 탄 아이들로 소란하다. 고만고만한 생의 명랑이 넘치는 네 명의 어린아이들의 인솔자는 그들의 할머니다.

생의 발랄과 호기심이 가득한 여행 속의 아이들은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있다.

노인 혼자 부산한 아이들을 통제하기에는 힘이 부쳐 보이지만, 할머니 또한 들떠 있긴 마찬가지이다. 경계가 없는 아이들은 좌석 사이 통로를 왔다 갔다 하며 주변을 금방 활기찬 재잘거림으로 접수한다.

우리나라 최대의 군인 훈련소가 있는 역에서 한 무리의 중년사내들이 다시 열차 안으로 새로 영입이 된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봐서 그들은 오랫동안 태양 아래서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을 몸 노동자들이다.

검게 그을린 노동의 얼굴 안에도 여행의 기대로 아이들과 같은 종류의 들뜸이 보인다.

그 다섯 사내들은 시간이 되면 늘 함께 날을 잡아 여행을 떠난다고 열차 안 누군가에게 말을 전한다.

열차 안은 대부분 머리 희끗한 노부부들의 모습이고 간혹 어린아이들과 함께한 젊은 부부와, 친구들이나 친목회에서 함께 온 모습들이다.

알레그로 안단테로 느리게 기차는 남쪽으로 향한다.

역에서 마주치는 빠르게 경유하는 KTX열차도 기다리다 먼저 보내주며, 다투지 않고 여유를 가지고 그렇게 지리산 자락의 남쪽을 향해 흘러간다.

섬진강 물줄기처럼 천천히 흐르는 열차 안에서 여행객들은 각자의 이야기와 차창 밖으로 보이는 푸르른 초여름의 신록으로 눈 속을 물들인다.

그런데 중년사내들의 여행을 즐기는 방법이 좀 구태의연하다.

작정하고 마시러 나온 듯 시종 일관 술병이 오고간다. 음주여행을 온 모양으로 밖에 안 보인다.

그들의 평소 놀이문화가 고스란히 기차 안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이야기 삼매경에 빠지는 것의 매개체가 오로지 술로만 보인다.

술을 담아온 아이스박스를 보며, 예전 관광버스를 탔다가 차에 오르자마자 술잔을 차례로 돌리고 마이크를 들이대며 억지로 노래를 시켜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간다.

여행은 지친 삶에 잠시나마 여유로움을 가지게 하는 충전보조제다.

그 충전보조제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또한 자신들의 몫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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