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넷째 날, 농담이나 실수로 시작하는 사랑(오산~평택)

▲ 길을 걷다보면 가장 많이 만나는 친구들이 강아지들이다. 혼자 걷는 내게 아이들을 한번 씩 만져주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다.

펼쳐지는 논·밭 풍경에

서울과 멀어지는 것 실감

 

약국 이름에서 연상 된 친구

그와의 소소한 소통이 설렘으로

 

함께하지 않았던 탓에

그 순간이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소소한 소통이 일상의 힘이 된다면

오산에서 떠나는 날 아침에 한 약국을 보았다. 약국이름 때문에 혼자 피식 웃었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만난 한 친구의 이름. 그 이름이 약국 상호로 걸려있었던 것이다. 여행하기 전에 만나 여행이 끝나고 멀어진 우리는 어떤 사이였을까?

지금 생각하면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그저 작은 호감하나 가지고 있던 정도. 그 날 아침 약국 간판 사진을 찍어 그 친구에게 보내며 평소와 같은 농담을 던지곤 했다. 사소한 에피소드지만 여행하는 동안 날 지루하지 않게 해주었던 존재다. 일상의 소소한 소통이 그렇게 설렐 수 있었던 것인지. 그 날들이 그립기는 하다. 그 뿐이다.

오산에서 평택으로 가는 길에 접어들면서 논과 밭을 많이 보게 된다. 점점 서울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 실감났다. 국도와 마을길을 오가며 걸었다. 머리끈이 필요해서 허름한 구멍가게에 들렸다. 혹시 머리끈이 있을까 했지만 역시 없었다. 대신 새우깡을 사 들고 나왔다. 주인아주머니가 노란 고무줄을 주면서 당신도 놀러 다니실 때는 머리가 그렇게 성가셨다면서 챙겨주셨다. 감사하게 받았다. 새우깡에 노란 고무줄은 덤으로. 걸으며 한손에 새우깡을 들고 먹으며 든 생각이다. ‘이렇게 주워 먹으니까 살은 죽도록 안 빠지는거 같다 ㅎㅎ.’

새우깡을 먹으면서 걷다 오산 비행장까지 왔는데 유독 검은 하늘에 매캐한 습기가 느껴졌다. 영풍제지에서 나오는 공장 연기인데 근처에 있는 모든 것들이 먼지에 덮여있는 느낌이었다. 그 앞을 지나갈 때 화학냄새가 심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비행장으로 착륙하는 커다란 비행기가 머리 위로 지나갔다. 뭐든 새로운걸 보면 신기해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나쁜 냄새도 금방 잊었다. 

평택시에 도착했다. 역시 처음 와보는 도시지만 도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숙소를 잡아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가격대비 호화로웠다. ‘웬일 일까?’숙소에 들어가면 도저히 나올 수 없을 것 같아 밥을 먹고 들어갔다. 씻고 푹신한 침대에 벌렁 누웠다. 곯아떨어질 것 같지만 너무 고단해서 일까 오히려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혼자 있는 것이 어색해 TV를 틀었다. 영화채널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한다는 예고가 나왔다. 이게 왠 행운일까?

◇‘시작은 키스’. 오드리 또뚜의 색감

정말 오랜만에 괜찮은 영화를 봤다. ‘시작은 키스! 2012’(감독 다비드 포앙키스노)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치 내 이야기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고 주변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친구들의 이야기 같은 영화였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우리도 그렇게 시작하지 않았나. 오드리 또뚜(나탈리 켈 역)와 프랑수아 다미앙(마커스 역)처럼.

영화는 스토리가 속도감 있게 빠르게 진행된다. 나탈리는 남편이 죽고 난 후 슬픈 하루하루를 보낸다. 장례를 치르고 자신의 직장으로 돌아가 여느 날처럼 적응해 살아가고 있을 즈음 마커스를 만난다. 마커스는 누가 보아도 남자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못 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다(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멋있어 보이는 기적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일 처리를 위해 상사 나탈리의 방으로 들어간 마커스는 뜬금없는 나탈리의 키스를 받게 된다. 나탈리는 아름다운 외모로 직장에서 총애 받는 여자였고 마커스는 소심하고 일 처리도 못하는, 존재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마커스는 나탈리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나탈리는 이를 순간의 실수라고 부정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생각에 불현 듯 건 낸 키스였기 때문이다. 하필 그 상대가 ‘마커스’라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나탈리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는 마커스뿐만이 아니다. 멋있는 직장 상사도 있었으나 나탈리는 유쾌하고 섬세한 마커스에게 어쩐지 마음이 끌린다. 사내연애를 시작한 둘은 비밀리에 연애를 하기로 했으나 어느새 들켜버리고 만다. 나탈리는 자신이 못생긴 사람을 사귀고 있다는 창피함과 그럼에도 마커스를 사랑하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한다. 사내에서 마커스와의 연애가 들통 나 둘은 따가운 눈총을 받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나탈리는 마커스를 데리고 그녀의 할머니가 살고 있는 시골로 간다. 그 곳은 어린 나탈리부터 남편과 함께였던 시절의 나탈리, 슬퍼하던 나탈리, 지금의 나탈리가 존재하는 곳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힘들었던 두 사람이 시골의 마당에서 숨바꼭질 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마커스의 대사와 함께 끝이 난다.

“난 이곳을 걸으며 그녀의 슬픔을 밟는다. 바로 이 모든 나탈리들의 가슴 속이 내가 숨을 곳이다.”

프랑스 특유의 분위기와 오드리 또뚜가 출연한 영화들에서만 볼 수 있는 색감이 있는 영화다. 오드리 또뚜가 주연한‘아멜리에’나 ‘무드인디고’에서 처럼 판타지적 요소가 있을 것 같다는 의심은 또뚜가 만들어내는 착각이었다. 동화같은 결말은 여전했지만 야수같이 못생긴 남자 마커스와 인기가 많은 나탈리의 빤한 사랑이 결코 식상하지 않았다.

오산 약국 이름과 같은 친구가 생각났다. 실수로 시작해 진실한 사랑으로 이어지는 사랑도 있겠지 하고 스스로 꿈을 꾸었던 걸까? 영화를 보는 동안 농담이나 실수가 사랑이 된 나탈리처럼 내 농담도 여행이 끝나면 그렇게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작은 키스’와 같은 영화를 보면 현실적인 생각들은 뒤로 미뤄두지 않는가. 영화니까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금은 그 친구와 영화 속 이야기처럼 농담이 사랑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것대로 아름다웠다고 생각한다. 이런 시작이 있으면 저런 시작도 있는 것이니까. 그 친구와 함께하지 않아 들었던 생각들이 그 순간을 더 풍요롭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리운 마음과 함께 했던 순간들이어서 더 소중한 것은 아닐지.

‘시작은 키스’를 보고 그 감동이 가시지 않아 뒤이어 영화 한편을 더 보고 늦게 잠이 들었다. 참 행복한 하루였다. 

글·사진/안채림(광운대 경영학& 동북아문화산업과 복수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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