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아침부터 분주했다. 식전부터 면도를 하고, 머리를 감고, 몸단장을 하고 세차장으로 향했다. 내 자동차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자동차에게 미안했다. 평소, 사람을 귀찮게 하는 것은 그 무엇이든 주저 없이 버려야한다고 생각해오던 나는 자동차가 바퀴만 굴러가면 아무리 지저분해도 타고 다니는 편이었다. 그런 성격을 잘 아는 아내는 며칠 전부터 ‘어르신을 모시고 가는데 제발 차 좀 닦으라고’ 내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래도 나는 익숙해진 소리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귓등으로 흘려보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자동차 상태를 본 나는 바퀴가 굴러간다고 그냥 타고 갈 상태가 아님을 알았다. 혼자 타고 다니던 어제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는데, 어른을 모시기에는 더러워도 너무 더러웠다. 나무 아래 세워두었던 차는 온갖 먼지와 송홧가루가 흩뿌린 비에 범벅이 돼 있었고, 시들어 떨어진 꽃잎과 나뭇잎, 거기에 큼직한 새똥까지 달걀 프라이드처럼 곳곳에 달라붙어있었다. 신경이 쓰였다. 모처럼만에 뵙는 어른을 이런 차로 모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물이라도 뿌리고 가야했다. 털썩 달라붙은 새똥은 고압분사기로 쏘아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틈새마다 끼어있는 꽃잎과 이파리도 마찬가지였다. 한낮엔 날이 뜨거워 냉방기를 켜야 할텐데 송풍구에서도 곰팡이 냄새가 났다. 여기저기 손을 봐야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한 손은 차를 닦으면서도 혹여 늦기라도 하면 어쩔까 마음에 다른 한 손은 연신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가끔이라도 세차를 했다면 걸레질만 해도 되었을 일을 몰아서 한꺼번에 하려니 더디기만 했다. 손은 더디고 마음만 급했다.

땀깨나 뺀 다음에야 겨우 시간을 맞춰 첫 번째 어르신을 사창동에서 모셨다. 다시 내덕동에서 함께 동행 할 후배를 태웠다. 그리고 상당산성을 넘어 미원을 지나 옥화대를 지나 금관 숲에서 또 한분의 어르신을 모셨다. 두 분은 후배와 나의 은사님이셨다. 은사님 두 분은 우리를 보자 무척 기뻐하셨고 한동안 뵙지 못했던 우리도 기뻤다. 기뻐하시는 모습을 뵈니 먹고사는 핑계를 내세워 자주 찾아뵙지 못한 내가 더 죄송한 마음이었다. 이미 오래 전 퇴직을 하신 두 분은 지금은 각기 도시와 농촌에 살고 계셨다.

청천을 지나 화양동을 거쳐 선유동으로, 다시 선유동에서 가은으로, 농암으로, 농암에서 낙동강 최상류 물길을 따라 청화산을 끼고 돌며 골짜기와 벌판을 달렸다. 스쳐 지나는 곳마다 백두대간의 연봉들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은사님 두 분은 쉬지 않고 말씀을 하셨다. 요즘 정치판도 말씀하셨고, 화양동을 지날 때는 송시열을, 가은을 지날 때는 이강년 의병대장을, 화북을 지날 때는 견훤산성을 보며 견훤을 이야기하셨다. 자동차 안은 역사를 공부하는 강의실이 됐다. 자동차 안이 답답해질 즈음 쌍용계곡, 화북, 늘티를 넘어 솔면에 도착했다. 솔면 버섯찌게를 파는 식당에 도착해 조금 늦은 점심에 반주라고 하기에는 많은 막걸리도 곁들였다.

막걸리가 거나해질 즈음 산보도 할 겸 두 분과 함께 화양동 숲길을 걸어 파천으로 내려갔다. 계곡에서 올라오는 시원한 물소리와 연녹색 봄빛이 귀와 눈을 맑게 했다. 술과 물과 숲에 취해 두 분은 퇴직 후 당신들의 생활과 소회를 바람처럼 말씀하셨다. 한 분은 도시에서의 일상을, 또 한 분은 농촌에서의 일상을 풀어놓으셨다. 비록 사시는 공간은 달랐지만, 두 분의 말씀 속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언뜻 허허로움(?)처럼 들렸지만 그 무엇을 갈구하거나 지나간 세월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아니셨다. 바람 한 점 없는 잔잔한, 깃털처럼 가벼운, 전혀 거리낌 없는 평안한 고요함이 깃든 말씀이셨다. 그래서 두 분을 뵌 것이 더욱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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