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대 경영학과 교수

무심천은 통일신라 때는 남석천(南石川), 고려 때는 심천(沁川), 대교천(大橋川), 조선시대에는 무성(武城)뚝, 일제강점기에 무심천(無心川)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 사연을 알바 없이 무심하게 흐르는 냇물이라 하여 무심천(無心川)이라고 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무심천은 청주 지역에 있어 매우 유용한 하천이고 청주시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우리나라의 산천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북출남류(北出南流)의 하천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청주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며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지형이다. 따라서 무심천은 다소 특이한 남출북류(南出北流)의 하천이다. 북쪽으로 흐르던 무심천은 미호천을 만나 다시 방향을 틀어 남서쪽으로 흘러가다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던 금강을 만나 서해안으로 빠져나간다.

그러면서 무심천의 물은 청주지역을 다시 한 번 감싸주며 생기를 응집한다. 그러니 무심천은 무정(無情)하게 흘러가는 물이 아니라 청주를 유정(有情)하게 굽이굽이 감싸주며 유심하게 흘러가는 유심천(有心川)이다. 자연의 형세로 보면 무심천은 무심하지 않고 유정하고 유심하다. 풍수에서 물길은 횡류하는 물을 중요하게 본다. 물이 직거수(直去水)로 똑바로 흘러가면 생기도 빠지고 사람도 떠나고 재물도 떠난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청주의 무심천은 남에서 북으로 횡류하니 청주의 진산인 우암산을 타고 내려오던 생기가 무심천을 만나 멈춘 곳이 청주의 도심지다. 원래 무심천의 물길은 더 안쪽으로 들어왔으나 1906년 8월의 대홍수로 인해 유로(流路)가 변경됐고, 1939년과 1969년 도시가 정비되면서 유로를 다시 서쪽으로 변경시켜 직강화(直江化)하면서 오늘날의 무심천이 됐다.

물길을 직선화하면 물이 빨리 흘러 바람 길이 되고 생기를 가두지 못한다. 생기를 가두어 주려면 물이 천천히 흘러야 하고 물이 모여들어야 한다. 물을 천천히 흐르게 하는 방법으로는 무심천에 수중보를 만드는 방법이다. 서울의 한강이 88올림픽을 계기로 수중보가 설치되면서 한강의 유속이 느려졌으며 이 후 한강변이 더욱 각광을 받는 계기가 됐고 서울의 발전이 가속화됐다.

다음으로 무심천을 유심천으로 만드는 방법은 무심천 하구지역에 생태공원을 조성하는 것이다. 도시에 생기가 모이려면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처(水口處)가 좁게 관쇄가 되고 하수사(下水砂:물이 흘러나가는 쪽에 있는 砂)가 잘 갖추어져야 한다. 좋은 예로 순천에 가면 순천동천이 순천만으로 흘러가는데 이곳에 자연생태공원 외에 순천동천 하류 쪽에 순천만 정원을 조성해 순천을 안온한 도시로 만들어 순천의 비약적 발전을 견인하고 있다. 청주에는 무심천과 미호천이 만나는 합수부에 문암생태공원이 있는데 이를 중심으로 생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인공산, 방풍림, 인공저수지 등을 조성한다면 보다 청주시의 도심지가 안온하게 될 것이며 청주의 발전을 가속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청주는 도심을 물이 가로 지르고 물길이 환포하고 있어서 형국으로 보면 행주형(行舟形) 도시로 본다. 청주가 행주형 도시였기에 조선시대에는 청주읍성 내에 철당간(12.7m)을 설치했고 청주시 청사를 건축하면서 시청사를 배의 모양으로 형상화했다. 서울의 여의도가 행주형인데 63빌딩이 들어섰고, 서울의 잠실이 행주형인데 123층의 롯데월드타워(555m)가 건축되고 있다. 청주에는 어느 곳에 돛대 역할을 할 상징건물을 둘 것인지 이제는 검토할 때가 됐다고 본다. 지혜를 모아 여러가지 방법론을 모색해 무정한 무심천을 유정한 유심천으로 만들어 가야 할 시점이 도래했다. 청주도심을 활성화하고 통합청주시의 발전을 가속화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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