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교수

행하는 법도가 틀렸거나 머무는 법도가 틀렸거나 나아가는 법도가 틀렸다면 착한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하더라도 법도에서 어긋났다면 어긋난 것은 어긋난 대로 명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다만 착하다는 선(善)의 명(命)은 오고가는 윤회의 법칙 속에서 맑은 영혼을 간직할 수가 있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운명에서 나타나는 형태를 살펴보면 여러 가지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자신의 욕심으로 인하여 운명을 돌이킬 수가 없는 수렁으로 끌고 가는 경우가 있고 사(邪)된 마음으로 생존경쟁의 논리를 가지고 부딪치는 일마다 죄를 범하여 생겨나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경우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형태의 운명을 지니게 되지만 어떠한 결과가 되었던지 자신의 일에서 자신이 받아야 하는 명은 필명(必命)이 된다.

이때에 길신(吉神)과 흉신(凶神)은 번갈아 드나 들면서 사람의 정신을 혼란하게 하고 마음을 부질없게 하며 운명을 위태위태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 하필이면 흉신(凶神)들과 교류를 가지게 된다면 그 사람의 운명은 도저히 구제 할 수가 없는 상황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하늘에 준엄한 율법의 필명(必命)을 받아야 하는 경우도 발생을 한다.

운명에서 죽음은 반드시 이야기가 되는 것이고 어떤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발생을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남의 문제로만 생각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의문이 생기는 것은 선한 행실의 사람들이 돌연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경우에서는 크게 두 가지의 측면에서 이해를 하는 것이 좋다.

첫째, 오류적상황이다. 하늘은 천도(天道)의 율법을 시행하는 일에서 유기적인 생명을 먼저 부여하고 그 이전의 업보에 대한 훈화(訓化)적인 측면에서의 하늘에 령(令)으로 보는 것이다.

둘째, 하늘이 그 사람에게 인간의 시련을 감(減)하여 주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인간의 시각으로 볼 때에 죽음은 흉이고 슬픔이고 아픔이며 안타까움이 될 뿐이지 하늘의 법에서는 죽음이라는 그 자체가 결코 흉하다고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운명은 생존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존 과정에서의 운명이 제아무리 위대하고 험난하더라도 운명이 운성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느 것보다도 운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명의 시점에서는 길신과 흉신이 급박하게 드나들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도 험난함이 크고 두려움도 큰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에서 경(敬)한 마음과 정(正)한 생각과 조화로운 감정을 상실하기가 매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급박한 상황이 연출될 때에는 밖에서 무엇인가를 구하려고 하는 것보다도 자신의 선을 점검하며 행실을 살피며 마음을 살피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처럼 자신을 단속하였을 때에 일으키는 발념(發念)은 아름다운 꽃이 되고 그윽한 향기가 되며 새로운 운명을 만드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물론 글로써 표할 만큼 세상살이가 간단하고 쉬운 것만은 아니지만 무엇이든지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을 하려는 자신의 습성을 버린다면 의외로 이치는 가까이 있고 이치에 순응하려는 마음도 쉽게 열리는 것이다.

이렇게 순리에 따르는 순응의 자세에서는 흉신이나 마와 같은 재앙이 오히려 짚고 일어설 수가 있는 지팡이가 되어 자신의 운명에서 화려한 추억으로 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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