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숙 수필가

고속터미널 지하철역 출구에서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높이는 족히 건물의 4층 정도였다.

양손에 짐을 잔뜩 들고 있고 큰 여행 가방까지 곁에 가지고 있던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계단 위를 바라봤다.

그때 재빠르게 내 곁을 지나치던 청년이 큰 가방을 번쩍 들고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의 뒷모습을 보는 몇 초 사이에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험한 세상 가방 날치기 범은 아닐까! 하던 찰나에 계단 끝 참에 청년은 가방을 턱 하니 내려놓고 뒤도 안보고 그대로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와 눈이라도 마주치고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 했는데 그는 무심히 사라진 것이다.

나는 그의 친절을 왜곡하고 세상의 잣대로만 생각한 것에 내 스스로 무안하고 화가 났다. 내 불신이 청년의 아름다운 친절을 가방 날치기로 몰았기 때문이다.

오래 전 그 날의 해프닝은 가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이따금 고개를 내밀곤 한다. 그리곤 그 이름 모를 청년에게 빚을 갚듯 길을 지나가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것을 보면 상대방이 불편하지 않는 범위에서 힘을 보태곤 한다.

가령 아기를 업고 힘겹게 물건을 들고 가는 새댁의 짐을 같은 방향이면 들어 준다든지, 계단을 오르는 다리 불편한 노인을 만나면 팔을 부축해 함께 걸어 올라간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요즘 세상이 험하게 바뀌다 보니 그런 작은 호의도 상대방이 불편해할까봐 망설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세상은 점점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며칠 전 지인 J와 차를 타고 시골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벚꽃들이 한차례 지나가고, 뒤이은 이팝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한 길 위로 늦 봄 뜨거운 햇살이 폭죽처럼 쏟아진다.

그 시골길 옆을 고추 모종판을 싣고 경운기 한 대가 느리게 앞서 가고 있다. 도로 위가 고르지 못해 경운기는 제 속력을 내지 못하고 심하게 흔들리더니 결국 고추 모판 하나를 길 위로 떨어뜨린다.

경운기 모터의 요란한 소음 때문인지 운전하는 노인은 그 사실도 모르고 계속 전진이다. 그 광경을 보고 애가 탄 나는 J에게 차를 세우고 이야기 해주자고 했지만, 미처 내 말에 대처를 못하고 J는 그냥 경적만 울리고 경운기 곁을 지나쳤다. 경운기 노인도 자동차 경적 소리가 뒤차가 추월하니 조심하라는 소리로만 알고 경운기를 더욱 갓길로 부치고 운전만 한다.

뒤늦게 내 얼굴에 크게 쓰인 불편한 심사를 느끼고, 아차! 싶은지 J는 한참 지나온 길을 다시 되돌아 좀 전 지나친 경운기 옆으로 갔다. 경운기를 멈춘 노인은 그때서야 연유를 듣고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한다.

-J야 우리 잘 좀 살자!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고! 사소하지만 이런 것들이 하루 하루 잘 사는 거야!

나는 한결 누그러진 마음으로 조용히 J에게 말했다. 그러나 좀 전 상황을 미쳐 못 보고 지나친 J가 크게 잘못한 것은 없다. 세상에 대한 오지랖 넓은 내 잘못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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