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내가 우은정 화가를 처음 만났던 것은 대학원에서였다. 그러니 십여 년 전쯤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사람들 입을 통해 그 이름을 들어왔던 터였다. 그리고 여성적인 이름에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는 선입관으로 인해 나는 그가 무척 가녀리고 야들야들한 모습의 그림꾼일 것이라 상상해왔었다. 바람으로 치면 봄날 솔솔 부는 솔바람 같다고나 할까.

그러나 나의 기대는 우 화가를 만나는 순간 산산조각이 났다. 허름한 입성에다, 전혀 곱상하지 않은 얼굴, 어디 한 곳 잘생긴 구석이 없는 이목구비, 민둥산 머리까지, 난 그의 겉모습에 대단히 실망하고 말았다. 게다가 입만 열면 어수선한 수사로 머릿속을 혼란에 빠뜨렸다. 만약 그림에도 논리가 필요하다면 우 화가는 재수강을 해야 할 판이었다. 모름지기 예술가라면 입을 열지 않아도 뭔가 예술가다운 풍모가 풍겨야하지 않겠는가. 

그건 내가 이제껏 그려왔던 화가의 모습이 아니라, 눈만 뜨면 우리 동네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만고강산 노는 형님들의 전형이었다. 우 화가는 이제껏 내가 관념적으로 생각해오던 그런 화가의 말끔한 이미지에 금을 가게 했다. 솔솔 부는 이쁜 바람이 아니라 벌판을 달려온 거친 광풍이었다. 한동안 나는 우 화가에게 받은 그런 느낌을 앞세워 그를 그림꾼들 속에서 제외시켰다.

그리고는 가끔 우 화가 화실에 들를 때면 작업장을 들여다보며, ‘뺑끼 지랄하고 있다’고 악담을 해댔다. 그래도 그는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뿐이었다. 그가 그리는 그림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고사하고 볼 줄도 모르는 나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니 내가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코끼리를 본 적도 없는 어떤 사람들이 제각각 코끼리 이야기하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다만 어디서 들은 풍월은 있어 화가들이 쓰는 물감이 매우 비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내가 ‘뺑끼 지랄’이라고 한 것은 작품성이 아니라 넓은 화판을 채워야하는 물감 값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더구나 우 화가 그림은 커도 너∼무나 컸다. 뜨고 있어도 감은 것이나 다름없는 내 눈에는 수작의 대작이 아니라 크기의 대작이었다.

화가의 작품을 물감 값부터 걱정할 정도로 문외한이었던 내가 우 화가의 작업실을 드나들며 점차 그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외모에서 풍겼던 첫인상 광풍과는 달리 우 화가의 내면은 따뜻하고 잔잔한 솔바람이었다. 내가 싫어하는 말당이지만 우레를 뚫고 지나와 ‘이제는 돌아와 국화 옆에 선’ 그런 사람이 우은정 화가였다. 그러자 그의 그림이 조금씩 보였다. 지독한 소외, 지독한 외로움, 밤길을 걸으며 지독한 두려움을 느껴본 자가 아니면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가벼움과 유연함이 우 화가의 그림에는 녹아있었다. 지극한 소통을 겪고 난 다음에야 맛볼 수 있는 절대 고독이 그의 그림 속에는 있다. 이제는 우 화가의 색채 속에서 물감 값이 아니라 묘한 아우라를 느낄 정도로 빠져들었다. 그는 항상 바람을 타고 다닌다. 아니 어느날은 광풍을, 또 다른 날은 솔바람을 타기도 하며 바람과 더불어 살고 있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의 정신이 어떤 바람을 품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내 정신이 혼탁해질 쯤이면 그의 작가 정신을 차용하기 위해 화실을 찾아간다. 그리고 나의 약한 구석을 보이기 싫어 방어기제를 편다. 그리고 한마디 한다.

“오늘도 또 뺑끼 지랄만 하고 있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악담이 아니라 찬사의 뜻이 담긴 말이다. 우은정 화가가 전시회를 한단다. 연녹색이 좋은 오월에 대청댐 바람을 끌어들여 절대 고독을 보여주려나 보다. 가난한 화가가 그 비싼 물감으로 또 얼마나 지랄을 했는지 대청미술관에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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