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하늘의 논리 가운데에서 가장 큰 것은 순리(順理)와 역천(逆天)의 논리가 있다. 하늘은 반드시 순리를 따르는 것을 좋아하고 순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순리의 길에서는 복을 지니고 있지만 순리에서 벗어난 길에는 반드시 재앙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주어지는 순리의 삶이란 역경을 견디었을 때에 주어지는 즐거움이다 보니 사람들이 순리의 길을 외면하고 쉽고 편안한 길을 찾다가 역천(逆天)의 길목에서 보여지는 수많은 형태의 운명을 볼 수가 있다.

첫째는 평탄 지속형이니 이러한 경우는 사람의 운명에서도 가장 보통의 삶이고 일상의 삶이며 하늘에서도 보편적으로 바라는 삶이다.

무릇 사연이 많으면 추억도 많고 역경이 많으면 경험도 많으며 가진 것이 많으면 근심도 많은 것이다. 그래서 보통의 삶으로 자식을 낳고 자식이 자식을 낳는다. 그리고 손주가 큰 절로 절을 하니 손주의 귀여움이 얼마나 크던가. 물론 이러한 삶이라 하여 어느 정도의 우여곡절이야 없겠는가 마는 그래도 평온함이 잔잔한 물결이라 그런대로 한 세월을 즐기는 여유도 있으리라.

둘째는 흥망성쇠형이니 천당과 지옥을 이승에서 경험을 한다. 한때는 잘 나가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신문지상에서 떠들고 사람들은 그를 흉보는 소리로 야단법석들이다. 영웅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범한 운명도 못되는 것이다. 그래서 쇠를 달궈 칼을 만드니 칼을 쥐었으나 칼날을 빼앗겨 오히려 화(禍)를 입는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그를 보고 비웃지만 자신은 영웅인 냥 정신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한 세월을 정신없이 보내고 보니 옛님의 박수갈채 소리가 눈시울을 뜨겁게 할 뿐이다. 물론 가난의 시련으로 젊음을 모두 보내고 말년이 되어서야 큰 기쁨을 맛보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셋째는 망함이 겹쳐서 쇠하는 형이니 운명은 참으로 안타까운 운명을 만들기도 한다.

처음에는 전답을 빼앗더니 이제는 밥그릇을 빼앗는다. 그리고 또 밥그릇을 빼앗더니 이제는 숟갈을 달라고 한다. 처음에는 사랑을 빼앗더니 이제는 추억을 빼앗는다. 그리고 또 추억을 빼앗더니 이제는 희망을 달라고 한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희망을 보는 이가 없고 그의 추억을 듣는 이가 없으며 아무도 그와는 사랑을 나누지 않는다. 아무도 전생에서 만든 업보가 아니라면 이처럼 애처로운 운명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옛 성현들께서는 살아생전의 선을 가르쳤으리다.

넷째는 흥함이 겹쳐서 성함을 보는 형이니 사람이 살아가는 희망이 되고 꿈이 되고 이상이 된다. 부럽기가 하늘과도 같고 세상살이가 별천지와도 같다. 태어날 때에도 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더니 살아가는 것도 왕후장상이로세! 기쁨도 크고 욕망도 크고 즐거움도 크고 거만함도 크다. 모든 것들이 크다보니 작은 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볼 수가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잘해도 박수갈채요 못하여도 칭찬뿐이니 어느 날 어느 시간에 자신을 되돌아보오리까. 가끔씩 들려오는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구차한 변명의 소리로 들리기가 쉽다.

왕후장상의 부귀도 지나간 생의 선함에서 불러왔다면 지금의 가난도 지나간 생의 악함에서 불러 왔으리니 지금의 가난을 토양으로 자신에 선함을 배우게 하고 지금의 부귀를 바람으로 자신에 선함을 소홀히 하는 것은 한 가닥에 운명의 천에서 부리는 조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사람은 눈을 떠야 한다. 마음이 무거우니 두렵고 마음이 어두우니 방황을 하며 마음이 조급하니 해매이고 마음이 복잡하니 캄캄한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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