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 홀로 걸어서 국토대장정을 시작하며

▲ 지난 2월 4일부터 25일까지 서울 당산동을 출발해 전남 해남군 땅끝마을까지 ‘나 홀로 국토대장정’을 마치고 손바닥에 일정을 써 해남 앞 바다와 함께 기념촬영 했다.

현대와 같은 교통수단이 발달하기 이전 옛 사람들은 지역에서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걸어야 했다. 신분이 높거나 부자들은 가마나 말을 이용했지만 일반 서민들의 경우 아무리 먼 거리라도 걸어야만 목적지에 다다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가장 빠른 길, 가장 걷기 좋은 길을 내고 누군가 처음 길을 낸 자국을 따라 이어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이용한다. 길은 단순히 지나쳐 가는 길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곳에 많은 추억과 애환을 남긴다. 그것이 옛 길의 문화였고 옛 사람들의 삶이었다. 길에 관한 문화가 사라진 현대, 20대 여대생이 서울서 해남 땅끝마을까지 약 500km를 혼자 20일간(2월 4일부터 25일까지) 걸었다.

충북 청주에서 나고 자란 광운대학교 3학년 안채림(22·경영학& 동북아문화산업 복수전공)씨다. 어느 날 여행에 대한 무한한 욕구가 그녀로 하여금 무작정 길을 나서도록 했다는 것. 무작정 떠난 길 위에서 그녀는 무엇을 보고, 느끼고 어떤 추억을 남겼을까. 그녀는 많은 사람을 만났고 길고양이, 강아지, 토끼와 소 등과 같은 동물과 지역마다 다른 자연 풍경을 보았다. 하루 종일 걷다 숙소를 찾아 들어가 쉬는 시간에는 늘 좋아하는 영화가 함께 있었다. 본지는 ‘영화와 함께한 그녀의 여행이야기’를 독자와 함께 엿보기로 한다.

 

여행에 대한 갈증… ‘국토대장정’ 떠올라

영화 ‘와일드’ 여정 정리해 준 열쇠

무작정 배낭 꾸려 길을 나서다

 

◇그 출발에 대해

10대 고교시절을 인도여행으로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여행다운 여행을 해보지 못했다. 대학이라는 또 다른 사회에 들어가야 했고, 대학생활에 몰두하겠다는 핑계이기도 했다. 지나고 보면 마음만 먹으면 여행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습관화된 일상에서 벗어나 배낭을 꾸려 길을 나선다는 것은 역시 절실한 무언가가 작용해 줘야 한다.

인도에서 떠나온 지 정확하게 4년 만에 불현듯, 여행에 대한 갈증이 학교생활과 관련된 여러 현실적인 문제, 예를 들면 중국어나 스페인어 공부보다 더 절실해졌다. 이쯤에서 여행을 해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내가 살고 있는 이곳, 한국을 여행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겨울방학 동안 공부하겠다는 계획은 그냥 뒷전으로 미뤄뒀다. 학원등록을 해야 하는 시점에서 ‘국토대장정’이라는 화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의 변화를 친구와 가족들에게 말했을 때 가장 먼저 들은 대답은 “여자 혼자?” “말도 안돼” “위험해” 등등의 말이었다. 주변사람들의 반응이 내 생각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왜 안 되는데?” “나는 나를 지킬 수 있어” “걱정하지 말아요” 등등의 말로 대답하면서 나도 모르게 정말 그 대답들을 실천해 보여야 할 것 같은 고집이 생겼다 할까.

그렇게 염려하던 가족들도 “그럼 일단 시작해 보던지” “힘들면 언제든지 포기할 수도 있는 거다” “응원 할 께”로 변하면서 마음먹은 지 열흘 만에 배낭을 쌀 수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서울 당산 충북학사에서 해남 땅끝마을까지 약 500km를 20일간 걷기로 했다. 하루에 대략 25km를 걸어야 한다. 운동이라고는 한강에서의 자전거 트래킹이 전부였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걷는 코스는 자전거 길로 정하고 백프로 인터넷이 제공하는 네비게이션에 의존하기로 했다. 발목붕대와 입마개, 룸메이트가 빌려준 호신용스프레이 등을 필수품목으로 하고 배낭을 쌌다. 최대한 가볍게 더욱 가볍게.
◇왜 영화와 함께였을까?

대학생활을 하며 내 꿈은 수시로 변했다. 그렇지만 늘 영화와 여행에 대한 남모를 열정과 사랑은 변함이 없었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미래의 꿈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게 영화와 여행은 뗄 수 없는 관계다. 영화는 학교 다니며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영화관에서 개봉영화를 보거나 인터넷이라는 무한정보공간에서 얼마든지 보고 싶은 영화를 다운받아 볼 수 있었다. 몇 년간 쌓인 여행에 대한 갈증을 푸는데 영화가 함께 한다면 더 없이 기쁜 일이라고 생각했다.

도보여행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제제는 어느 날 내게 한권의 책과 영화를 추천했다. 도보여행을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한 여자의 성장기인 “와일드”(셰릴 스트레이드 저/ 나무의철학)”라는 책과 이를 영화한 영화 “와일드”(장마크 발레 감독/ 리즈 위더스푼 주연)다.

나는 먼저 교보문고로 갔다. ‘4285km, 이것은 누구나의 삶이자 희망의 기록이다’라는 부제를 단 책의 표지에 ‘누구나 한 번은 길을 잃고, 누구나 한 번은 길을 만든다!’ 는 홍보용 문구만을 보고 읽고 싶은 흥미가 생겼다. 여행하는 동안 조금씩 읽어야할 책으로 결정하고 집어 들었다. 최대한 가볍게 싸야할 배낭에 책으로는 오직 한권 “와일드”를 집어넣었다. 그러나 영화는 차일피일 미루다 출발하기 전에 보지 못했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왔는데, 개강하고도 며칠이 지난 후(3월 22일) 놀랍게도 아직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마치 나를 위해 기다려준 것 같았다. 

유년시절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셰릴은 어린 시절의 상처가 아직 치유되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엄마의 죽음을 맞이한다. 세상과 가족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품은 채 엄마와 이별하게 된 셰릴은 26세의 나이에 남편과도 이혼한다. 희망이라고는 없는, 모든 것을 다 잃었다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셰릴은 어느 날 자신의 인생을 이대로 내팽개칠 수 없다는 마지막 순간에 여행을 하기로 한다. 4천km가 넘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THE PACIFIC CREST TR AIL)을 홀로 걷겠다는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힌다.

PCT는 멕시코 국경에서 시작해 캐나다 국경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서부를 종단하는 4천238㎞의 도보여행 코스다. 거친 산, 눈 덮인 고산지대, 아홉 개의 산맥과 사막 그리고 광활한 평원과 화산지대까지, PCT는 인간이 만날 수 있는 모든 자연환경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평균 152일이 걸리는 극한의 도보여행 코스로 ‘악마의 코스’라 불린다. 더욱이 이 구간은 사람이 사는 마을은 찾아볼 수 없는 고독의 공간이다. 도보 여행자는 육체적인 피로는 물론 수시로 찾아오는 외로움과 두려움에 맞서 싸워야한다. 셰릴은 이 길을 걸으며 새로운 인생과 만난다. 밖으로 표현하지 못했던 수많은 상처를 끄집어내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던 것처럼 내버리는 연습을 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 이 영화를 봤더라면 아마도 나는 풍경의 경이로움과 셰릴의 평범하지 않은 인생 이야기에 매료돼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여행의 기록으로만 보았을 것이다. 대리만족이나 간접경험 정도랄까. 하지만 나는 영화가 끝나자마자 여행 중에 참아 왔던 울음을 한 번에 터트려버렸다.

서울에서 해남까지, PCT에 비하면 길이 면에서나 코스의 난이도 면에서나 너무나 짧고 쉽다. 불우했던 셰릴의 삶과 내 삶은 비교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하루하루 계획한 거리만큼 걸어가면서 그동안 울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목적지에 가기 전까지 힘들어도 어린애처럼 울지는 않겠다는 다짐을 수도 없이 했다. 소리를 지르고 싶을 만큼 힘든 순간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꾹꾹 참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셰릴에게서 그랬던 내 모습이 얼핏 보이자 여행을 끝낸 지 한 달 만에 영화관에서 울음이 터져버렸다. 상처투성이의 발을 이끌고 여행을 멈추지 않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 속에서 그녀가 맛본 새로운 희망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끼리의 절대적인 공감.

여행이 끝나고 한달 동안 미뤄두었던 여정에 대한 정리를 마친 느낌이다. 영화 “와일드”는 걷는 내내 참으며 풀지 못했던, 혹은 풀고 싶지 않았던 매듭을 풀어주는 역할을 해주었다. 누구에게는 힐링영화라 하겠고 누구에게는 실화를 기반에 둔 다큐멘터리 영화라 말하겠지만 나에게는 내 안에 쌓아두기만 했던 여정을 정리해주는 열쇠와 같은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여행 중에 썼던 글과 사진들이 피곤이라는 단어에 묻혀 기록이 중단됐고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마음 한편에 여행을 끝내지 않은 것 같은 찝찝함이 있었다. 영화 “와일드”를 보면서 비로소 내 느닷없었던 ‘국토대장정’이 막을 내린 기분이다.

방황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사람은 늘 방황하고 길을 찾지 못하고 살아간다. 나의 길은 어디일까 생각하며 하루하루 지치고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실제 길 위에서는 목적지가 분명하고 내가 도달해야할 목표가 명확하다. 하루하루 정한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그동안 맛보지 못한 특별한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일상에서의 길과 여행지에서의 길이 다른 점이다.

여행을 끝내고 다시 학교라는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겨울방학을 특별하게 만들어준 여행의 기록을 시작하려고 한다. 무모한 도전이라고 걱정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발이 부르트고 발바닥에 못이 박혔지만 그래도 가지 않은 길을 가보는 짜릿함은 그 통증에 비길게 아니라고. 그 여정 내내 영화가 나의 유일한 친구가 돼 주었다. 길에서나, 일상에서나 그리고 지금 이 글에서나 당연히 함께 가야할 운명이다.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몸과 마음의 긴장이 풀렸던 것일까? 한동안 앓았다. 이제 영화관에서 한참을 앉아 울던 나를 달래줄 준비가 되었다. 출발해 볼까.

 글·사진/안채림(광운대 경영학& 동북아문화산업과 복수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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