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의심이 많은 사람은 모처럼 만나는 좋은 기회일지라도 놓치기가 쉽고 모처럼 생겨난 좋은 인연 일지라도 오래 가기가 어렵다.

또 애초에는 의심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욕심으로 키우는 사람은 큰일을 이루기가 어렵고 처음에는 의심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의심으로 키우는 사람은 좋은 만남을 이룰 수가 없다. 그래서 이러한 꼬임에서 허둥대는 사람을 지혜롭지 못하다 하고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재앙을 부르기가 쉬운 사람이 되며 재앙이 많은 사람과의 인연은 결코 오래갈 수가 없는 것이다.

무릇, 자연사(自然事)가 그러한 것처럼 인간사의 일에서도 이치가 있고 순리가 있고 단계가 있고 변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일에서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만남에서의 순리를 알지 못하며 일에서의 단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변화하는 그것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는 길마다 막힘이 생기고 하는 일마다 고달픔이 생기며 만나는 사람마다 슬픔이 생겨나는 것이다.

한편 사람들은 좋은 인연을 원하면서도 자신이 어떻게 좋은 인연을 지녀야 하는가를 망각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베풀기를 좋아하여 사람들에게 정성껏 베풀었건만 돌아오는 것은 허탈감뿐이다”라고 말을 한다면 이것은 지혜로움의 부족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모름지기 베푸는 것에도 베품의 묘안이 있고 베품의 선택적 사항이 있으며 베품의 법도가 있는 것이다.

첫째, 베풀 때의 마음이 그것이다. 무엇을 바라고 베푸는 것은 상대에게 기회주의자처럼 보여 지는 것이며 누군가를 동정을 하여 베푼다면 그것은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베풀 때에는 무엇인가를 바라지 말고 원하지도 말며 자랑을 하지도 말아야 한다. 이것을 베풀 때의 묘안이라고 한다.

둘째, 베풀되 베풀 자리를 보고서 베푸는 것이다. 이것은 같은 물이라도 거미가 물을 마시면 훗날에 거미줄을 만들고 소가 물을 마시면 훗날에 우유를 품게 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마음이며 선한 마음이 되겠지만 선(善)을 선으로 쓸 수가 없는 자에게 베품은 선으로 독(毒)을 키우는 것과도 같고 베품으로 독을 없앨 수가 있는 선(善)한 사람에게로의 베품은 지극히 아름다운 보시가 되며 애초에 선한 사람에게 독마(毒魔)가 들 수도 있는 형태의 베품은 하지 말아야 할 베품이 된다. 이렇듯 베품의 이치를 알고서 베푸는 것을 선택적 사항이라고 이름을 한다.

셋째, 베풀되 예의 법도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베품은 스스로의 기쁨이 되고 충만이 되며 자랑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기쁨이 많으면 넘치고 충만이 많으면 깨어지는 것이며 자랑이 많으면 교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남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과도 같다. 그래서 베품의 법도는 지켰을 지라도 자신의 법도를 어기게 되면 스스로가 먼저 무너지는 결과를 보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볼 때에 무엇인가를 베푼다고 하는 것은 행동철학이 되고 실천철학이 되기 때문에 나아감의 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아가 일을 할 때에는 자신의 지혜로움이 있어야 하고 자신의 지혜로움 속에서 값진 것들을 함께 할 때라야 진실한 의미의 지혜로움이라고 한다. 물론 지혜 속에는 이치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지혜를 논할 수가 없을지라도 그 중심을 키워야 한다는 사실에서 지혜 속에 지혜로움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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