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숙 수필가

봄 햇살이 때 이른 더위를 만나 성급하게 기온을 올리는 날들이 며칠 새 이어진다.

겨우내 교복처럼 몸에서 걷어 내지 못한 두꺼운 겉옷을 과감히 벗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집 문밖을 나선다. 얼굴에 와 닿는 따뜻한 바람이 한결 부드럽고 상냥하다.

언 듯 여린 풀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담장너머에서 길가로 고개를 내민 개나리 가지 끝에는 노란부리가 다투어 여기저기 비집고 나온다.

맑은 햇살이 투명하게 내려앉은 S중학교 운동장 안에는 체육수업을 받는 학생들로 소란스럽다. 그때 왁자한 아이들의 소리 속에 유독 높은 소리 하나가 내 귀에 와 닿는다.

너무 잘하려 하지 마!

이 무슨 투지에 김 빼는 소리인가!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젊은 남선생이 학생들 앞에서 하는 말이다.

내용인즉슨 그는 잘하려는 욕심으로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는 소리를 학생들 앞에서 하고 있다. 그 또한 어느 한때 저 아이들과 같은 청소년기를 보냈을 테고 대학 졸업 후 임용고사를 통해 체육선생으로 학교에 부임했을 것이다.

몸을 건강하게 하는 체육활동마저도 경쟁에 치여 즐기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을 아이들을 생각한 선생의 따뜻한 배려와 사랑이 담긴 당부다.

내 기억 속 중·고교 학창시절 체육선생들은 학교에서의 훈육 악역을 도맡았다. 교복 검사나 머리 검사를 할 때, 왜 소도 때려잡을 기세로 커다란 몽둥이를 휘두르며 우리들에게 위협을 가 했는지 모르겠다. 개인차가 있는 체육활동이 여학생들에게 때때로 고역의 시간으로 느껴지게 했다.

운동이야 말로 몸 건강과 더불어 자동으로 정신 건강을 튼튼하게 하는데 말이다.

지금 생각해 봐도 학창시절의 체육시간은 유쾌하지가 않다. 체육활동 그 자체를 즐기지 못하고 가장 잘하는 체육 특기생에 맞춰 몰아만 갔던 선생들의 수업 방식이 안타깝다.

지금 저 선생이 이끄는 체육 활동은 못하든 잘하든 간에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로 아이들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형제들 중에 학교 성적이 상위권에 들었던 나는 어린 날부터 부모의 기대와 주위의 칭찬 속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 학창 시절은 그만하면 됐지 라는 만족을 모르고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휩싸여 그 시기에 누릴 행복한 시간들을 갖지 못했다.

늦은 밤에도 편히 이불 속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대부분 책상위에서 엎드린 채 자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스스로 만든 불만족이란 감옥에 갇혀 우울한 청소년기를 보냈던 것이다.

윽박지르고 불안한 환경속의 정서에서의 학습활동보다 안정적이고 격려 속 행복한 마음이 드는 환경에서 아이들이 성적이나 학습 의지가 올라간다는 실험이 있다.

스트레스 지수가 낮고 따뜻한 격려와 존중이라는 울타리 속 아이들의 학습활동이 월등 좋아진다.

삶의 사회에서 경쟁이란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는 산물이다.

하지만, 그 스트레스 속에서도 행복한 긍지를 가질 때 일의 만족도나 능률이 더 오르는 것을 살면서 늘 느낀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