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세기 서구에서는 이성과 과학적 탐구가 발달하면서 모든 면에서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 때 사회는 커다란 혼란을 겪었고 루소 같은 철학자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며 인간성의 회복을 부르짖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자연 파괴적이며 심성이 거칠어지고 있었기에 그러한 구호가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다. 당시 상황이 그렇고 보면 루소가 죽은 지 몇 백년이 지난 오늘의 사회는 얼마나 세속화됐을까 하는 점은 짐작할만하다.

오늘의 심성은 루소가 말하는 자연상태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것 같다. 모든 심성이 그렇다고 할 수 없지만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면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다.

다툼 아닌 협동의 사회여야

화제가 될만하기에 보도가 되려니 하지만 희망적인 뉴스를 기대하며 텔레비전을 마주하는 시간은 우울하다. 끔찍하고 패륜적인 사건이나 싸움이 국내·외적으로 그칠 줄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제는 사건을 일상적인 일로 여길 만큼 감정이 무뎌가고 있다.

그러나 이는 문제에 대해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감한 불감증인가 하는 점이다. 생각해 보면 사람에게 이러한 불감증보다 무서운 병적인 상태는 없을 것이다. 생명을 하찮은 존재나 물질 정도로 생각하는 생명 존중에 대한 불감증이나 그릇된 일에 대한 불감증은 개인이나 사회를 막다른 곳으로 몰아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대상을 자신과 상관이 없다고 간주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낳고 상대를 적대시할 수 있는 인간성이 파괴된 예로 이러한 사회는 불행한 사회이다.

사회를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의식의 틀을 바꿔야 한다. 지금처럼 갑론을박(甲論乙駁)하는 풍조로는 끝없이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인 결과만을 가져올 것이다. 가정이든 사회이든 건강하려면 불신이나 비난이 아니라 심성을 순화시키며 긍정적인 사고나 문화를 만들어 확산시켜야 한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감정은 무섭게 전이되고 확대 재생되는 특성을 지니고 의식 속에 부지불식중에 자리를 잡기 때문이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이 공연히 생긴 것이 아니며 사람은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분위기로부터 초연할 수 없다.

오늘의 갈등은 국익보다는 자신들을 위한 상대와의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싸움이라는 점에서 더욱 비생산적이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막중한 국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매스컴에 흥행으로 등장하는 배우나 가수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국민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배우나 가수들은 좋은 연기를 보여줘도 인기가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점에서 싸움이나 비난으로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배우가 아닌 지도자들은 시청자들에게 어떻게 비쳐질 지 역지사지(易地思之)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긍정적 문화 창출할 때

사회는 보이지 않는 줄로 연결돼 있고 누구도 사회라는 공기를 마시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이 점에서 사회의 불행은 개인의 불행으로 이어지고 부정적인 풍조는 개인에게 전염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회에 속한 사람들은 문제에 무감한 이기주의자가 되거나 그러한 병으로 지독하게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어려움을 겪는 시기가 아닌가 싶다. 이제는 불신과 비난의 부정적인 요소를 내려놓고 긍정적인 문화를 창출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이전투구(泥田鬪狗)식으로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모두가 격이 떨어지는 패자만이 될 것이다.

국가의 흥망성쇠를 짊어진 지도자들은 사회의 부정적인 저류에 책임을 느끼고 지도자다운 품격 있는 의식을 보여주어야 한다. 모두가 바라는 것은 싸움도 아니고 지도자들이 불행하게 감옥에 가는 것도 아니며 사회가 긍정적인 의식을 창출해 희망의 고지를 향해서 힘차게 굴러가기를 원하는 것일 뿐이다.     

황문수 충청대 영어통역과 교수 hms10@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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