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매년 이맘때가 되면 가슴이 설렌다. 일주일 후면 새 학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올해는 어떤 녀석들을 만나게 될까 하는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무엇을 어떻게 전달해야 녀석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에 부담감이 들기도 한다.

이 대학 저 대학을 전전하며 강의를 다닌 지도 벌써 십수년이 넘었다. 내가 만난 많은 학생들 중 대부분은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소외된 녀석들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수능 점수가 형편없어 하층위에 속한 녀석들이다. 녀석들의 특징은 한결같이 자신감이 없다는 점이다.

개강 첫날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젊은 녀석들이 도통 활기가 없다. 무엇을 물어봐도 반응이 없다. 무엇인가 해보려는 의욕도 보이지 않는다.

녀석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공부 못하는 놈!’이란 가정과 학교와 사회의 낙인 때문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주변으로부터 그런 편견을 받으면서도 이젠 화석처럼 굳어져 그것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들이 받는 이런 부당함에 대해 분노도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주 어려서부터 공부를 못하는 아이로 찍혀 판단능력을 거세당했기 때문이다.

이런 녀석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젊은이다운 생동감을 찾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녀석들 가슴속에 꿈과 희망을 심어줄 수 있을까? 매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그것이 고민이다.

작년 타도에 있는 어떤 대학교에서 강의 요청이 왔다. 학생들 글쓰기 지도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거절했다. 글쓰기의 범주가 워낙 넓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문장 하나 제대로 부려 쓰지 못하는 요즘시대에 정해진 장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백과사전처럼 통틀어 글쓰기라 하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럭저럭 시간만 때우는 일이라면 녀석들이나 나나 각자 나름대로의 자리에서 편하게 노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일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진 학과장의 말에 공감해 출강을 하기로 했다.

그 학교는 이과 계통에서도 건설 쪽에 국한된 특수한 대학교였다. 배우는 과목들을 봐도 문과 출신인 나는 무엇을 하는 공부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선생과 학생들 사이가 이렇게 먼데 뭘 해야 할지 선뜻 감이 오지 않았다. 학과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학생들이 딱딱한 전공만 하다 보니 도통 응용력이 없다. 경직돼 있는 학생들의 생각을 유연하게 해 달라’는 요지였다. 그래서 학생들이 무엇을 가장 싫어하는지부터 알아보았다. 그것은 자신들의 생각을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따르기만을 강요하는 어른들의 강요된 교육이었다.      

나는 녀석들 사이에서 빠지기로 했다. 천편일류적인 교재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매주 그들에게 과제를 주고 발표와 토론을 시켰다. 훈련이 되지 않은 녀석들의 발표와 토론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그럴 때마다 답답해 관여를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꾹꾹 눌러 참았다. 가능한 한 내 생각은 배제하고 녀석들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니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녀석들의 얼굴에서 생동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저주저하며 인사도 제대로 못하던 녀석들이 복도에서 만나면 큰소리로 자신감 넘치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농부는 욕심이 너무 많아도 농사를 망친다. 모든 부모들이 자신들의 자식을 천리마로만 키우려고 하지만 그 욕심이 외려 자식을 십리도 뛰지 못하는 무녀리로 만들 수 있다. 세상에는 천리마도 필요하고 백리마도 필요하다. 천리를 뛰는 말은 행복하고 백리를 뛰는 말은 불행하다는 생각은 이 세상 어른들의 아주 그릇된 고정관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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