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세상의 모든 것들은 왔던 곳으로 다시 가고 갔던 곳에서는 다시 생겨나는가? 부여잡았더라도 언젠가 가야만 하는 것이고 맺어졌더라도 언젠가 쪼개어 지는 것이며 꼭 맞았더라도 언젠가 흩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운명 속에서의 우리들은 갈 곳이 있으니 이 얼마나 큰 기쁨이 될까? 모든 것들은 왔다가 가는 그곳이 있기에 왔던 이곳도 기쁨이 되고 가야만 하는 그곳도 기쁨이 되리다.

왔다고 하여도 갈 곳이 없고 갔다고 하여도 방황하는 영혼들이야 얼마나 큰 고통이 될까? 사람들은 왔기에 갈 곳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오늘은 보람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이다. 만약에 오고서도 갈 곳이 없었다면 오늘의 보람인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오늘의 기쁨인들 무슨 가치가 있으리요, 그래서 우리가 부족하였기에 지금의 이것들이 보람이 되고 기쁨이 되고 가치가 되는 것이리다.

그리고 헤어짐이 없었다면 무엇으로 지금의 만남에서 기쁨이 될까? 또 만남이 없었다면 무엇으로 지금의 헤어짐에서 슬픔이 될까? 만날 수도 없고 헤어지지도 않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도 없다. 그래서 오늘의 이것들이 내일의 저것들로 다시 모이리라.

만남이란 참으로 묘(妙)하기도 하다. 그때의 만남이 있었기에 지금의 이야기와 추억이 되고 지금의 이 일을 하는 것일까? 그리고 지금의 만남에서 훗날의 거름이 되고 마음이 되고 결실이 될 터인데 어찌하여 헤어짐을 지금의 헤어짐이라고 말을 하오리까? 다만 우리가 만남 때문에 너와 내가 이렇게 되는 것은 인연으로 생겨나는 마음과 생각이 운명을 그렇게 하였으리다.

그리고 이제 너와 내가 새로운 인연과 새로운 희망의 길을 가더라도 우리의 운명은 그렇게 흐르고 있으리니 그때의 우리가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으며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남아 있겠는가? 그리고 오늘 그때의 상처가 지금에서는 살이 되었고 지금의 상처가 훗날에서의 추억을 만들고 있다.

다만 시련으로 운명을 만드는 것처럼 흐름을 타고 흐르는 운명은 그렇게 또 다른 운명의 흐름을 만들고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 이전에 운명에서 그때의 운명을 만들었고 그때의 운명에서 지금의 운명을 만들었으리니. 또 지금에 운명에서 내일의 운명을 만들고 있으리다.

오늘을 살아가는 잠깐의 세월에도 끝없는 만남과 헤어짐이 찾아드는구나! 설혹 지금의 눈동자가 창공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마음조차 창공에 머물러 있을까? 그렇다면 지금의 만남은 무엇을 만나고 있을까? 하늘일까, 바람일까? 아니면 희망일까, 추억일까? 그것도 아니면 문틈사이로 흐르는 구름과의 만남일까? 도대체 어떤 것들이 운명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바람이 되고 있더냐! 보는 것일까? 듣는 것일까? 하고 있는 일일까? 아니면 들고 있는 이 무거운 업보일까? 애석할지라도 보고 듣는 것을 버릴 수가 없고 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으며 무거운 업보 또한 지울 수가 없으니! 모두가 운명의 소중한 지팡이들이라! 그것이 대나무로 만들어졌던지 아니면 늙은 소나무로 만들어졌던지 나그네의 지팡이야 지팡이로서 운명의 동반자가 되었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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