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하늘이 설정하는 법도를 천도(天道)라 이름을 하고 하늘이 정하는 령(令)을 천명(天命)이라고 이름을 하며 사람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필연(必然)을 명(命)이라 이름을 하고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 동안에서 사용하는 하늘의 기운을 운(運)이라 이름을 한다. 그리고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의 운명이 하늘로부터 이미 정하여 졌던지 아니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가 개척해야 하던지 간에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삶을 영위하는 동안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명이 있다는 사실과 생명을 유지하는 동안에서 운의 영향으로 삶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필연의 사실이 있다. 그래서 사람은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 날 수가 없는 생을 영위하는 존재인 것이다. 반면에 죽음은 인간이 부여받은 명가운데에서도 생이라는 명의 뒷면처럼 생과 죽음은 동시에 상존을 하고 있는 필명이다.

다만, 생을 영위하고 있는 존재의 주체자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죽음은 현실 그 자체라는 것이다. 바꿔 이야기하면 생은 죽음을 만들어 가면서 오늘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존재라고 이야기 할 수가 있다. 즉 죽음이라는 무한대의 시공을 토양으로 비유하고 토양에서부터 피어오르는 기운으로 유한대의 시간과 공간의 교차점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에 피어오르는 기운을 운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은 운명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현실이 슬픈 일이기도 하지만 기쁜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운명의 속박은 굴레가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속박은 믿음의 힘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구속과 속박이라는 운(運)을 버리고 산 속에서 홀로 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의 자신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운을 만드는 것이고 다시 세상 속으로 적응을 하려는 사람은 그의 자신이 또 다시 산을 그리워하여야 한다는 또 다른 운을 만드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생을 갈망하면서부터 운명이라는 굴레가 참으로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갈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생을 영위하면서 나타나는 굴레의 모양을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여기에서 반드시 받아 들여야만 하는 것을 숙명이라고 말을 한다.

다시 말해 운명은 세월이 멈추지 않는 한은 변화를 끊임없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운명이 진행하는 동안에 수많은 인연들과의 관계가 어떠하느냐에 따라 제각각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나뭇잎과도 같은 각체간의 특성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공장에서 기계소리와 함께 더 많은 인연을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맺어지는 인연의 모양과 형태와 시기와 기능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운명에서의 특성을 설정할 수가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리고 어떤 계기로 인하여 똑같은 상황에서 인생의 동반자로 삶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일지라도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인연들에서 또 다른 사고와 성품과 무념의 활동상태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함께 가더라도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운명에서의 분리의 법칙이 필연적으로 발생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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