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화(禍)와 복(福)이 오고 감에는 묘(妙)한 법칙이 작용을 한다. 복은 가벼운 깃털과도 같고 화는 무거운 쇠망치와도 같으며 복은 고요한 가운데에서 깃들고 화는 시끄러운 가운데에서 깃들며 복은 아지랑이처럼 온화한 곳에서 자라고 화는 매서운 바람처럼 차가운 곳에서 자란다.

그리고 복은 흩어져서 작용을 하는 것이고 화는 뭉쳐서 작용을 하는 것이며 복(福)을 잡으려고 하면 더욱 달아나는 것이고 화(禍)를 피하려고 하면 더욱 쫓아오는 것이다. 이처럼 화와 복은 성격을 달리하는 까닭이므로 머물고 작용을 하고 결실을 보는 것 또한 서로가 다른 상황에서 연출을 하는 것이다.

봄날에 곡식의 종자를 심는 것은 곡식을 거두기 위함이고 봄날에 가축을 기르는 것은 가축을 생육하기 위함이며 소년에 학문을 즐기는 것은 지혜로움을 얻기 위함이고 소년에 학문을 게을리 하는 것은 어리석음을 자초하는 것이며 장년(長年)에 아랫사람을 살피는 것은 노년(老年)의 외로움을 달래는 것이고 장년에 아랫사람을 함부로 하는 것은 노년의 고독을 떨굴 수가 없다.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화(禍)와 복(福)을 전달하는 전령사 역할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사회라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고 거대한 흐름을 일러서 천하(天下)의 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천하의 일 가운데에서 오로지 하나인 “나”라는 존재의 화복(禍福)은 “나”라는 존재의 성격에 따라 달리하는 것이므로 내가 머물러야 할 자리와 내가 나아가야 할 때와 내가 행하고 있는 그것들에 따라서 “나”라는 존재의 연출상황이 달라지는 것이다.

예를들면 친구나 다정한 사람들과의 전화 한 통화에서도 “누구야, 안녕! 그런데 좋은 일이 생기면 나와 함께 즐기게 연락을 주기 바란다”하고 말을 하는 사람과 “누구야, 안녕! 그런데 나의 도움이 필요하면 주저하지 말고 연락을 바란다”하고 말을 하는 사람사이에는 화복(禍福)의 연출 상황이 극명하게 달리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보답이 되면서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필연(必然)의 법칙을 걷고 있으며 이 필연의 상황에서 사람마다 화복(禍福)을 달리하고 내리막과 오르막을 달리하는 것이다.

왔다가 가고 피었다가 지고 떴다가 지고 하는 모든 일에서 한 날 한 시가 아니도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가 이처럼 단순하고 가벼운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인생을 고뇌의 바다라 이름을 하겠는가?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무언가 해볼만하다고 생각을 할쯤에야 천하가 흔들리고 세상은 이치에서 벗어나서 가는 일을 알 수가 없다면 어떻게 꽃을 따서 꽃바구니에 담는 즐거움을 맛이나 보겠는가? 그러나 여기에서도 이렇듯 하늘의 이치가 가벼운 것만은 아니리니 이미 봄날이 왔다면 꽃은 피고 봄새는 창공에서 노래를 하리니 이것도 하늘의 조화이련 만은 잠간을 다녀가는 북풍의 찬바람에서 허둥대다가 그물망에 걸린 몸으로야! 배는 허기지고 몸은 아파온다.

남들이야 밭에서 밭을 일굴지라도 바라다 볼 뿐이니 세월은 무심히 흘러가리다. 그리고 흘러가는 세월은 부여잡을 수가 없고 덧없는 세월은 또다시 북서풍의 계절이로다. 남들이야! 또 다시 그 즐거움에서 기쁨으로 노래를 하련만은 지난날에 허둥대던 자신의 영상만이 고요 속에서 부끄럽지 않느냐고 핀잔을 하는구나. 이 또한 화복(禍福)의 이치가 이와 같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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