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숙 수필가

삼한 사온이 지켜지지 않는 12월의 올 겨울은 첫눈부터 폭설로 시작해서 카랑카랑한 동장군이 기승이다. 그 매서운 기세가 좀처럼 꺾이지 않고 연일 맵고 추운 날씨의 연속이다.

태양력과의 차이나는 시간을 맞추기 위해 태음력에서 한 달을 더 중복해서 연장하는 것을 윤달이라 한다.

올해의 윤달은 10월 중순에서 11중순 까지 9월이 윤달이었다.

윤달에 연세 많은 부모가 있는 자식들은 그분들이 돌아가실 때 입고 갈 수의를 만들어 놓으면 장수한다는 속설에 미리 옷을 만들어 놓기도 하고, 그달에 결혼을 꺼려 예식장들이 한산하기도 해 비수기인 이 추운 12월에 늦은 혼례를 올리는 집안들도 많다.

음력 9월이 두 번이나 올해는 달력에 들어 있으니 주머니 속 두둑한 용돈처럼 여유로운 가을을 두 배로 즐겼다.

일 년 중 5월과 10월은 봄가을의 좋은 달들이라 곳곳에서 많은 행사들이 열리기도 한다. 5월의 단오가 그렇고 10월엔 상달고사가 그렇다.

시월상달은 ‘좋은 달’, ‘으뜸 달’로 칭하는 음력 10월을 말한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음력 10월을 1년 중 가장 좋은 달로 삼아 이때 집안의 안녕을 위해 가신(家神)들에게 올리는 의례를 행했다. 이를 ‘상달 고사’라고 한다.

서양의 추수감사절과 같은 맥락이다.

추수한 오곡백과로 고사 상을 차려 한해의 무탈함과 감사함을 제를 올리며 한해를 마무리한다.

해마다 10월 상달엔 사악한 기운을 내치는 상징의 붉은 팥소로 만든 시루떡과 막걸리로 간단한 제상을 차려 제를 올리며, 지나온 한해를 감사한다는 지인은 내게 올해는 함께 행사를 하자고 전갈을 보낸다. 몇몇 주변 사람들이 참가한 행사에 나 또한 함께 섞여 머리를 조아리며 한해를 감사한다. 음식 솜씨 좋고 바지런한 성정의 인정 넘치는 안주인은 어느새 오전부터 음식 장만과 팥죽으로 한상을 차려 참가한 사람들에게 대접을 한다.

어쩌다 몸이 탈이라도 나면 입맛을 살리는데 어릴 적 어머니가 해 주신 팥죽이 그중 내겐 으뜸이다. 그 어머니의 손맛이 그리운 날엔 손수 해 먹기엔 귀찮고 번거로워 죽 전문점에 들리곤 한다. 종일 걸려야 완성이 되는 팥죽은 이제 가정에서 거의 해먹지 않고 간편하게 음식점에서 사 먹는 것이 보편화 되었다.

찬바람 부는 동짓달에는 젊은 내 어머니는 팥죽을 빠지지 않고 해놓고 식구들의 입을 즐겁게 했다. 단단한 붉은 팥은 금방 음식이 되는 것이 아니다. 물에 불려 한소끔 뭉근하게 솥에서 끓여 잘게 으깨어 다시 끓여야 하는, 시간과 손이 많이 가는 정성이 필요한 기다림의 음식이다. 영하의 날씨에 죽 단지를 뒤꼍에 내어 놓고 살얼음 낀 팥죽을 밤참으로 퍼다 먹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이 수로 새알 옹심이 먹는 재미도 있었다. 묽은 팥죽에서 자칫 빠질 영양소를 보충한 찹쌀 옹심이가 부뚜막 위의 지혜였다.

어떨결에 남의 집 상달고사에 참가해 따뜻한 팥죽으로 속도 든든하게 채우고 안주인이 정성스레 싸준 발효액과 먹거리를 얻어 왔다.

좋은 기운의 음식과 사람들과의 관계야 말로 잘 먹고 잘사는 방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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