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세상의 모든 물건은 물위에 떠 있는 거품과도 같고 마음은 들판을 달리는 말처럼 가는 곳을 알 수가 없으며 세상을 산다는 것은 허깨비를 보는 것처럼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한 생(生)을 살아가는 나그네가 아닌가? 낯 설은 길을 조심히 걷는 나그네의 앞날에서야!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정처 없는 인생길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부여잡고 “어디로 가야만 하겠느냐”고 물어도 보지만 한치 앞을 살필 수가 없는 세상에서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본들 어찌 하오리까? 그래서 길을 떠나올 때야! 그곳에서 왔을 터이니 그곳으로 다시 가겠다 하겠지만 헤매이다 가는 길들은 모두가 제 각각이요 가지고 돌아가는 짐들도 모두가 제 각각이다. 애초에 길을 떠나 올 때에야.

많은 심성(心性)을 담고도 왔으리오 만은 세상살이에서 남아 있는 것은 메마른 심성(心性)뿐이로세! 그러하니 볼래야 볼 수도 없고 들을래야 들을 수도 없지 않겠는가? 가끔씩 기억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기억 저편으로 스치는 영상이 무엇이던가?

이것이 고요의 모습이요 고요의 소리요 고요의 미소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슴에 달린 단추하나요 가슴에 뚫린 구멍하나요 가슴에 새겨진 고요의 종소리이다.

이것을 풀면 만 가지가 풀리고 이것을 얻으면 만 가지의 소리를 얻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나그네께서는 이웃집 아낙을 따라서 어디로 가야만 하는가? 자갈밭이야 본래가 그러한 것이니 논에다가 볍씨를 뿌려야지 부질없는 발걸음으로 세월을 허비하지 말고 참아야 할 것들은 참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갈만한 곳으로 가야하고 볼만한 것을 보아야 하고 느낄만한 것을 느껴야 하지.

하염없는 발걸음으로 마음을 허비하지는 말아야 하리다. 그렇다고 부질없는 인연(因緣)끼리 무엇을 물어보리까? 그가 몰라서 답답한 것은 매 한가지니 내 마음만이 그것을 알고 있으리다.

그러하니 귀를 기울이고 조용히 있으면 뉘라서 나그네를 탓하오리까? 그러나 슬픔이 커지는 까닭은 그것이 가까이 있을지라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리다.

짧은 선념(善念)에서 자신의 꿈과 희망을 키우는 것이 바로 하늘의 틈새에서 나타나는 무지개와도 같다.

이때에는 구체적인 것이 없고 가능성도 희박하며 현실적으로 예측을 할 수가 없고 그렇다고 “이것이다”하고 맹진을 할 수가 없는 구상에 지나지 않는 생각과 마음이지만 그래도 이때에 느끼는 감정은 어느 때보다도 찬란하고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고요하며 생각은 어느 때보다도 순수하다.

그래서 이것은 아주 짧은 순간을 다녀가는 내 인생의 귀인이 되고 천덕(天德)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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