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숙 수필가

인근에서 가장 큰 사우나 시설을 갖춘 목욕탕에는 찬바람이 불면서 찾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세상사 자잘한 정보는 사우나 속 중년 여인들 입에서 먼저 나온다는 말처럼 늘 시끌벅적 활기가 넘치는 장소이다.

분홍 살빛 아기들을 데리고 온 젊은 새댁들부터 한세상을 깊은 모성으로 품었다 이제는 인생의 가을걷이 후 빈들 같은 몸의 노인들까지 늘 뿌연 열기 속 목욕탕은 날것의 삶을 정직하게 보여 준다.

환절기가 되면 고질적으로 찾아오는 인후염으로 더운 사우나를 한 후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좀 전부터 연세가 있어 보이는 할머니 한분이 내 등 뒤 간이 마루에 앉아 계신다. 조금 뒤 손녀가 옷을 입고 다가와 앉으며 할머니에게 말을 건다. 그런데 그 손녀가 맹랑하게도 어찌나 할머니와 살갑게 대화를 이어가는지 슬며시 나도 그들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대화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할머니가 놀러가는 동네 경로당의 막내 할머니에게 손녀할머니는 옷을 나눠 줬나 보다. 할머니는 아끼는 옷이었지만, 선물을 받은 막내할머니는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단다.

그 이야기를 하며 손녀는 그 막내 할머니는 멋쟁이라서 좋은 옷만 입으니, 자기 할머니한테도 제발 좀 좋은 옷들 장롱속서 아끼지 말고 입으라고 당부를 한다. 그 말에 할머니도 순순히 그러마하고 맞장구를 친다. 나는 그 소녀가 경로당 할머니들의 세세한 일까지 다 알고 자기할머니한테 조언을 하는 것이 한편으론 신기해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다 보다 소녀와 눈이 마주쳐 씨익 웃었다.

고등학생 정도의 소녀는 그 뒤로도 할머니와 다정한 친구처럼 대화를 한동안 살뜰히 주고받는다. 그리곤 목욕탕 의례행사인 매점 음료수를 나란히 마시고 일어선다. 무릎관절이 안 좋아 보이는 노인을 손녀는 팔을 부축한 채 다정하게 사우나 실을 나선다.

오랜 유대관계와 서로의 애정이 있어야 저런 편안한 풍경이 나올 것이다. 지켜보는 내내 괜히 가슴이 따듯해졌다.

내 기억 속 친할머니는 초등학교 입학 전에 세상을 뜨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다. 할머니는 일찍 할아버지와 사별하고 어린 자식들 건사에 팍팍한 삶을 살다 가신분이다. 그래서 인지 마음의 여유가 그리 많지 않으셨던 것 같다. 성정이 완고해 살갑진 않으셨지만 옛날이야기 하나만은 동네에서 최고였지 싶다.

손위언니는 할머니의 옛날이야기 광팬으로 밤마다 할머니를 채근하여 이야기보따리를 털어 놓으라 보채곤 했다.

무슨 얘기를 날마다 하라는 게냐 하며 할머니는 곰방대에 담배를 채워 넣고 한 모금 깊이 빤 다음 옛날에 하며 느리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산골의 밤 속으로 하늘에선 유성우들이 쏟아졌고, 여우골 나는 이야기에 밤잠을 잊은 우리들은 무릎걸음으로 할머니 치마폭에 파고들며 한 뼘씩 마음의 키도 커 갔다.

세상에 아름다운 풍경들은 많다.

맑은 가을햇살, 여름날 소낙비, 굴뚝의 저녁연기, 다정한 연인, 한밤에 내리는 눈, 천진한 아기의 웃음, 그리고 할머니와 손녀….

나도 위엄 없는 할머니로 미래의 손자들에게는 철없이 소통하는 그런 다정한 친구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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