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숙 수필가

여름날 세찬 소나기를 만나 한두 번씩 옷을 젖어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셋째 시간에 시작한 비는 오후 마지막 수업이 끝나도록 그칠 줄 몰랐다. 빗속을 뚫고 용감히 뛰어 사라지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교실 복도에서 서성이며 이제나 저제나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 비가 오후를 지나 다 저녁이 될 때 까지 그치질 않으니, 기다리다 지친 아이들이 하나둘 힘없이 복도를 빠져 나가고 몇몇 계집아이들과 사내아이들이 남았을 때 작당이라도 한 듯 아예 집에 갈 생각을 접고 공기놀이를 하든가 아님 복도 끝에서 술래잡기 놀이를 하였다. 그중에 유독 몸이 왜소하고 숫기가 없던 S는 어디에도 끼지 못한채 그저 창문 곁에 붙어 비가 내리고 있는 화단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어차피 방과 후 교실에 홀로 남아 선생님을 대신해 다음날 반 아이들의 아침 자습을 내야 했던 나는 산수 문제를 칠판에 빼곡하게 내고 나서 슬며시 S곁으로 갔다.

풀이 죽어 있을 듯 했던 그녀는 뜻밖에도 비가 내리는 여름의 풍경 속에 풍덩 빠져 있는 눈빛이었다. 물기를 머금은 풀잎의 생기어린 모습이 얼굴 안에 환히 들어 있었다. 초등 고학년 몸이라고는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는 저학년 어린아이 같은 몸에서 유독 그녀의 눈빛은 상급학교에 진학한 언니들의 눈빛을 가지고 있어 전체적으로 다 크지도 못하고 이미 나이가 든 애 늙은이 같았다.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그녀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었지만 별다른 말을 한 기억은 없다. 그 후론 S와 마주칠 일이 흔치 않았고 그녀는 늘 혼자의 세계 속에 있는 아이처럼 꿈을 꾸는 듯 말없이 아이들 뒤에 물러나 있는 것을 종종 보곤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산골의 아이들이 뿔뿔이 진학을 위해 도시로, 아니면 저임금에 시달리던 봉제 공장으로, 면직물 생산이 우리나라에서 세손가락에 꼽히던 방직공장으로 갔다.

S는 부모도 없이 늙은 할머니랑 지능이 떨어지던 고모랑 살았는데, 상급학교 진학은 꿈도 못 꾸고 서울 청계천 근방에서 새 같은 다리로 재봉틀 폐달을 밟고 있다는 소리가 풍문으로 들려 왔다. 뜻밖에 그녀를 다시 보게 된 것은 80년대 청계천 상가 근방에서였다.

내 앞을 지나치던 여자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유심히 나를 살피더니 아는 체를 한다. 등 뒤에 업힌 어린아이가 제어미보다 훨씬 커 보이는 형상의 여인이 아는 체를 하는데 전혀 감이 안 왔다.

어린 날의 S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고 세파에 지친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몸을 가진 애 엄마가 내 눈앞에 서 있었다. 봉제공장의 반장직을 하던 나이 많은 남편을 만나 결혼식도 못 올리고 아이를 낳고 살고 있다 했다. 돌이 갓 지났을 아이의 손에 지폐 몇 장을 쥐어 주며 행복하게 살라는 말로 얼버무리며 그녀와 어색하게 헤어졌다.

그때 거리의 어느 음반가게에서 틀어 놨는지 그 당시 한국인들에게 무척 사랑을 받던 폴모리아 악단의 ‘여름날의 소야곡’ 연주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 여름비가 내리고 우연히 폴 모리아의 ‘여름날의 소야곡’을 듣는다. 저 연주곡엔 힘겹게 아이를 업고 사라지던 S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던 20대의 내 모습이 어렴풋이 스며있다. 그때처럼 문득 우리가 어디서 다시 마주칠까 생각에 젖어 본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