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정신적인 문제와 관련해 종종 무지개 색깔의 구분에 관한 이야기가 인용된다. 무지개의 색에서 남색과 보라색의 경계는 어디서부터 시작돼 어디에서 끝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는 무지개 빛깔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듯이 사람의 심리 상태 또한 파악하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말처럼 인간 심리와 정신은 과거에는 파악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과 함께 정신 분석학자인 융이나 프로이트 등의 연구로 정신세계는 혁명으로까지 불릴 만큼 급격한 변화를 겪으며 그 신비가 벗겨지게 됐다.

인생, 육신과 정신의 조화여야

그 결과 현대 사회는 신의 영역으로 여겨진 정신 세계는 도외시하고 분명한 선이나 정확한 수를 중시하는 물질적 발달을 강조하게 됐다. 발달의 부정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오늘의 세태는 이러한 발달이나 인위적인 제도는 사회 유지를 위한 최소의 수단이 돼야지 그들이 전부라는 인식은 배제돼야 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문제는 지금까지 너무 자주 대두돼 진부한 문제로 외면을 받고 있으나 실제로는 이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중요성은 생각하면서도 현대인은 마치 당밀에 이끌린 벌처럼 물질이라는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과 무감함은 사회에 커다란 위험과 재난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을 키워나가고 있다. 삶이 힘겨워 자신의 부모나 자식을 버리는 등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비인간적인 행위 등이 그 단편적인 예이다.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서 낳아준 부모를 등지고 자신의 미래를 자학하는 행위는 물신주의가 빚은 참상이자 인본주의적 가치가 상실됐을 때 빚어지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은 육신과 정신이라는 이원 구조로 이루어진 존재로 육신만을 강조할 때 육신을 지배하는 영혼이 시들어 결국 육신마저 병들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인간은 영혼이라는 마부가 육신이라는 마차를 잘 이끌 수 있을 때 주인으로서 안락한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인간에게 가장 고귀한 가치와 행복은 그 조건이나 이해타산의 논리가 아닌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 등으로 육신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세계에 속하고 있다는 점은 알려진 이야기이다.

무지개는 분석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자연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현상으로 바라 볼 때에 아름다운 것이다. 이는 구체적 사고를 요구하는 시대에 뒤진 사고에서가 아니라 인간은 자연을 따르려는 자연성이 내면에 본질적으로 내재돼 있기 때문이다.

물질이 주도해 인본주의가 숨을 못 쉬는 사회에서는 역설적으로 그 같은 사고나 삶의 형태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영향을 최소화하면 할수록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믿는다.

무지개, 제대로 봐야 아름다워

신이 존재하든 하지 않든 그러한 세계를 수용할 수 있는 정신적 공간이 있을 때 삶의 의미 또한 풍부해지고 가치는 고양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인본주의적 가치가 배제된 물질적 추구는 삶의 질의 향상 측면에서 퇴보를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을 현실은 잘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인간은 자신의 욕망으로 눈이 가린 채 물질 추구에 혈안이 돼 한치 앞을 보지 못하며 삶의 이상적 공간을 점점 줄이며 어두움을 향해 끝없는 질주를 하고 있다.

신의 존재여부를 떠나 참된 인본주의는 그러한 영적 세계와의 교감을 하려는 노력의 과정을 통해 달성될 수 있으며 무지개는 어린 시절의 경우에서처럼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지닐 때에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고 믿는다.

황문수 / 충청대학 영어통역과 교수 (hms10@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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