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이것과 저것의 차이는 무엇이고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무릇 마음 가운데에서 참됨(眞)이 있을 때에는 마음이 있고 마음 가운데에서 참됨(眞)이 없을 때에는 마음도 없으며 운명(運命)가운데에서 바름(正)이 있을 때에는 길함(吉)이 있고 운명가운데에서도 올바름(正)이 없을 때에는 길(吉)함도 없다. 그리고 생명에서 생명의 근원이 있을 때에 비로소 생명에 있음(有)이 존재하여 생명체가 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서도 마음과 생각의 근원(根源)이 머물 때에 비로소 마음과 생각이 된다.

마치, 생명을 잃어버린 죽은 나무는 나무의 일생을 살아왔다는 형체를 지녔을 뿐이지 생명이 있는 나무가 아닌 것처럼 재물과 권력을 유지하는 사람이라고 하여서 높은 사람이나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을 하지 않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대저, 마음과 생각은 삶의 근원(根源)이 된다. 자연계에서 생명의 근원이 모여지면 생명체가 되겠지만 사람이라고 할 수 없고 이러한 생명체에서 마음과 생각이 머물렀을 때에 비로소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에서 참됨(眞)과 정(正

)이 머물렀을 때에는 그것을 올바름이라고 하고 올바른 것들을 올바로 유지 할 때가 참다운 운명이(運命)이 되며 이러한 운명은 마음과 생각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의 과정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운명 속에서 참다움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근본적인 것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머물고 있느냐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즉, 선(善)을 구하는 사람은 진실의 문에서 보여 지는 생명의 빛을 얻는 것이고 거짓을 구(求)하는 사람은 거짓된 문에서 보여 지는 유혹의 끈을 잡게 되는 것이며 이때에 펼쳐지는 삶의 과정을 운명(運命)이라고 표현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한 것처럼 운명에서도 시작과 끝이 있고 원인과 결과가 있으며 오는 곳과 가는 곳이 있다.

그래서 이별을 노래하는 고통도 증오를 간직하는 고통도 구하려고 애태우는 고통도 자신의 마음에서 시작하여 밖으로 드러나는 허울의 하나일 뿐이다.

한편으로 자신의 운명에서 자신이 어려움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에는 자신이 먼저 진실(眞實)의 문을 여는 것이다. 설혹, 어떤 사람이 진실의 문을 열었다고 하더라도 그 재앙이 쉽게 끝나지 않는 까닭은 이전(以前)의 거짓에서 시작하였던 결과가 있기 때문이지 지금의 진실이 이전의 거짓까지도 소멸을 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진실의 문을 쉽게 여는 요령도 거짓을 없게 하면 되는 것이지 진실의 문(門)을 열겠다고 야단법석을 떠는 것은 오히려 자신(自信)안에서 큰 거짓을 키우는 경우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진실(眞實)과 바름(正)은 자신의 변화를 위한 새 바램이 되고 나중의 고통을 없게 하는 운명(運命)에서의 사랑이 되고 근원(根源)이 되며 원인이 되는 것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