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숙 수필가

통신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절 유일하게 소식을 전할 수 있던 것은 편지나 전보였다. 전화기가 있는 집들은 한동네에 한 두 집이 고작이었다. 먼 곳에 살고 있는 친구와 만나기 위해서는 최소한 보름 정도는 기간을 두고 편지로 연락을 하고 날짜와 시간을 약속하였다. 그 기다리는 시간은 설렘으로 들뜨기도 했다.

종갓집이던 우리 사랑방은 시도 때도 없이 방문한 당숙 아재나 사촌들로 늘 북적였다. 식사 중에 그들이 예고 없이 들이닥쳐도 어머니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부엌으로 곧장 나가 손 재게 음식을 새로 해 한상 차려 방으로 들여오곤 했다.

그때 어머니를 따라 나가 김에 들기름을 발라 아궁이 숯불 앞에서 석쇠로 굽던 손위 언니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TV에서 가끔 외국인들과의 문화차이에서 오는 갈등을 목격한다.

대부분 딸집에 연락 없이 오는 장모를 무척 당혹해 하는 외국인 사위들을 보며, 우리 정서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들이 개인주의와 사생활 보호가 철저한 그들의 눈에는 예의가 없고 황당하게 비춰진 것이다. 부모가 자식의 집을 사전 연락 없이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다.

바쁜 현대의 흐름 속 우리들도 빠르게 그들의 문화에 흡수 되어 가고 있다. 또한 해가 갈수록 일인 가족이 늘어나는 분위기에 이제는 연락 없이 방문했다가는 정작 주인공을 만날 수 없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소모임을 하려해도 몇 달 전부터 상대방들의 시간과 스케줄을 보고 약속을 정해야 한다. 가까운 지인들과 모여 한 끼 밥이라도 가볍게 나누려도 흔쾌히 시간을 맞추기 힘든 세상이다. 초여름 같은 갑작스런 날씨에 순차적으로 피어야 할 꽃들이 일제히 속도위반으로 꽃망울들을 터뜨리고 있다. 그 봄에 취해 혼자만의 고적한 시간을 보내던 오후였다.

늘 조용하던 핸드폰이 소란스레 울린다.

심리 상담학계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지인의 전화다.

사전 약속도 없던 뜻밖의 전화였지만, 수분 망설이다 흔쾌히 그녀를 내가 있는 곳으로 오라 이른다. 예상치 못한 방문이지만 그녀가 반갑다. 잠깐 얼굴이라도 보겠다는 그녀의 발걸음을 어찌 물리칠 수 있겠는가!

핸드폰 속 너머 지인은 거듭 불시의 방문을 미안해했지만, 찾아온 그녀와 주변 이야기뿐 아니라 모처럼 속 깊은 이야기까지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눈썹 같은 밤하늘 초승달과 천변 벚꽃들의 환한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내내 따듯했다.

때론 이런 느닷없는 방문이야 말로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상에 푸른 수액을 수혈 받는 청정한 ‘힐링’의 시간이다.

소식도 없이 방문객들이 집에 들이닥쳐도 불편하거나 싫어하지 않은 부모님의 성정을 우리 형제들은 우성의 유전자로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 아날로그적 순박한 정서를 세월이 흘러도 언제고 내가 지녀야 할 덕목으로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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