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1년을 뒤돌아보면 유난히도 시위가 많았던 한 해였음을 시인한다. 여중생 장갑차 사건의 촛불시위, 그리고 화물연대로부터 최근의 부안군 위도 핵폐기장 원전센터 반대시위, 한·칠레 자유무역 반대시위, NEIS와 수능시험문제 이중답안 시비문제까지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사건들이 너무나 많았다.

자신들의 이권과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하다보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폭력적인 방법이 동원되고 이에 울분이 폭발되면 과격한 시위로 발전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한편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금년에 성행한 드라마나 영화중에는 끔찍하게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것들이 주를 이뤘다. 조폭마누라2에 이어 야인시대, 살인의 추억 등이 그 것이다.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왜 이렇게 폭력적인 것이 난무하는지 우리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것이 주로 폭력적인 것이라면 문제 발생시의 해결방법으로 폭력 아니면 해결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사태해결을 위한 평화적인 방법을 배우지 못했으며 그 것이 통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이 것이 가정폭력에서부터 비롯됐었음을 인식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최근에 만연되고 있는 가정폭력 사례들을 보면 남편이 아내, 아버지가 자식, 어머니가 어린자식, 오빠가 여동생, 손자가 할머니, 아들이 노부모, 며느리가 시어머니, 사위가 장모를 학대하고 폭력을 가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형태는 그 양상이  사실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남자가 여성에게 폭력을 가하고, 또 하나는 강자가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이다. 지난 1월 25일이 바로 ‘하얀 리본의 날’이었다.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임(딸사모)이 주축이 돼 비폭력 행위를 선포하며 폭력에 의해 희생된 자들을 기리는 날이었다.

딸이라 칭함은 여성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언어이다. 폭력을 휘두르는 자는 주로 남자이고 그 희생자는 약자가 대부분인데, 가정에서의 폭력의 주범이 주로 남자 즉 아버지였고 희생자는 부녀자인 셈이다. 그런데 그런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를 모델링하는 자는 주로 아들이기에 그 폭력은 대물림 되게 된다.

아버지의 ‘힘’에 눌려 기도 못피고 있던 어린 남아들이 비수의 칼날을 갈며 폭력의 힘을 휘두를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게 된다. 이렇게 대물림된 것이 가정폭력의 여러 양상으로 나타날 뿐인 것이다.

엊그제 뉴스에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은 뒤 노부모를 학대한 60대의 장남이 그가 받은 유산을 노부모에게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는 판결을 받았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2002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노인학대 실태조사 결과 장남이 경제적 학대 (금전적 갈취)를 가장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뜻이 관절되지 않으면 경우에 따라서 신체적 폭력으로 발전되는 사례들을 보기도 한다. 힘이 없으니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사회구조가 노약자 와 부녀자에게 불리하도록 되어있고 그 시발점이 가정이라는 점에서 모든 부모가 반성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에 온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공부 못한다고 쥐어패고 말 안듣는다고 학대하지는 않았는지? 그네들의 힘이 커지면 부모는 늙고 병들어 버리게 되니 학대는 물론이거니와 그보다 더한 버림을 당하게 된다는 당연한 논리를 미리 내다볼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듯 폭력은 또다른 발전된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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