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보는 눈이 지난날과 사뭇 다르다. 정년퇴임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것은 물론 구성원 사이의 관계도 다정다감이 사라진 느낌마저 든다.

경쟁이 새로운 이념으로 다가오자 썰렁한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다.  대체로 사람은 무슨 일이나 다 그렇겠지만, 자기에게 이익이 되거나 쾌감을 주거나 좋게 생각되기 때문에 그것을 하려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행동의 동기나 이유가 이해관계나 쾌감원칙 아니면 명예가치의 추구라는 세 가지의 기본 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흔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직장을 갖게되는 것도 직장을 통해서 일정한 소득, 수입을 얻게 되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안락한 생활을 꾸려나가며, 어떤 지위를 갖게 됨으로써 명예욕구를 채우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직장에서 구성원 사이의 관계가 협력의 화음이 아름답게 울려 퍼질 수도 있지만 때로는 말할 수 없이 거친 불협화음으로 고통을 겪게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어쩌면 사람이 모여 살게 되는 경우 피할 수 없는 운명적 상황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지난날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통하던 시절에는 그래도 비교적 조직 구성원 사이의 관계가 끈끈한 정으로 얽혀진 것을 실감할 수 있었으나 구조조정, 감원 등 정글의 법칙이 작용하는 살벌한 상황에서 그런 낭만은 찾아 볼 수 없는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홀로 존재하기에는 너무 외롭고 어울리고 나면 껄끄러운 관계가 불가피한 인간관계가 설명하고 풀이 할 길이 없는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어떤 심리학자는 ‘고슴도치의 딜레마’라는 말로 그 안타까운 형편을 표현하기도 했다. 옛날 고슴도치 두 마리가 서로 떨어져 각각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따로 따로 떨어져 사는 것이 너무나 외롭고 쓸쓸해서 어렵게 연락을 취하고 수소문을 하여 만나게 되었다. 지난날의 외로움이 하도 견디기 어려웠던 터에 마침내 서로 만나게 된 것이 반가운 나머지 앞 뒤 따질 것도 없이 힘껏 껴안고 뜨거운 감격을 나누었다. 그런데 피차의 몸에 돋아난 가시바늘에 찔려서 둘 사이에 힘껏 껴안으면 안을수록 아픔이 더해 갔다. 하는 수 없이 잠깐 떨어졌다가 또 다시 포옹을 시도해 보았지만 여전히 가시바늘에 찔리는 고통을 어떻게 해소시킬 방도가 없었다. 아쉽지만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그런 과정을 통하여 깨닫게 된 것이다.

직장이란 분명히 고슴도치의 딜레마 같은 측면이 있다. 혼자서는 도저히 실현시키기 어려운 이익과 쾌감과 명예를 직장을 통해서 얻을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저마다 지니고 있는 이기심이나 자존심이나 편견이나 고정관념이라는 가시바늘 때문에 날마다 가까이 에서 부딪치다 보면 아픈 상처를 받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 이상의 정신적. 심리적 상처를 받지 않고 비교적 평화롭고 긍정적 분위기 속에서 직장생활을 영위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라는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사람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지내는 데 있어서 원만한 관계설정의 문제로 귀착되게 마련이다.  70년대를 풍미하던 유행가 가사 중에 “헤어지면 그립고 만나보면 시들하고 못 믿을 것 이내 마음…” 했던 적이 있다.

‘갈등 증폭의 사회’ 혹은  ‘불신의 사회’라 현대사회를 규정하는 것도 다 이 같은 모순이나 역설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슴도치의 딜레마’같은 운명의 삶이 불가피한 현대사회라면 외롭게 사는 방법을 터득하는 지혜도 필요할 것으로 느껴진다. 고슴도치는 가시가 돋아 불행한 존재라 말 할 수는 없을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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