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무릇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모두가 천지(天地)를 어버이로 해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는데 어찌해 서로가 원망을 할 것이고 미워할 것이 있겠으랴! 또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천지간의 성(性)을 어버이로 하였고 하나의 본성(本性)으로 갈라졌는데 어찌해 서로에게 얼굴을 붉힐 일이 있겠으랴! 또한 마음 한편에서는 본성(本性)을 행하려는 마음과 사욕을 쫓으려는 마음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다투고 있다. 이때에 본성을 행하려는 마음에게 힘을 실어서 단 하루라도 사욕을 참는다면 그것으로 자신의 족(足)함을 보는 것이고 거짓을 잠재운다면 그것으로 자신의 진(眞)을 보는 것이며 방종을 버린다면 그것으로 자신의 성(性)을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로부터 생명을 이야기하고 본성(本性)을 말하는 것은 그것으로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의 본성을 지키려는 마음에 다가 자신의 정신을 보태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고 무엇이 아름다움으로 되랴! 모름지기 사람의 일에서는 많아도 문제가 되겠지만 적어도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부실한 것은 쉽게 무너지고 가벼운 것은 쉽게 날아가며 교묘한 것은 변하기가 쉬운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부실한 것으로 오래가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가벼운 것으로 기둥을 삼는 것은 보지 못하였으며 교묘한 것으로 믿음이 지켜지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마음속에서 이러한 마음들이 생겨나는 것은 모두가 그 본성(本性)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편 시대의 흐름이 반드시 그러할까 마는 가벼운 것들을 좋아하는 이가 많아지고 교묘한 재주를 섬기는 이가 많아지면서 성실하고 거짓이 없는 사람들을 오히려 바보 취급해 놀림을 하니 무엇으로 사람의 본성을 보존할까?

무릇 천지간에서 사람의 몸을 받았을 때에는 올바른 성(性)으로 시비의 분별을 똑바로 하게 되었는데도 어찌해 자신의 본성을 버려두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예로부터 자식을 가르침은 성(性)을 근간으로 하고 난 연후에 재주와 지식과 예도를 쌓았건만 뿌리는 잘라내고 재주와 지식으로 결실만을 얻으려고 한다면야 학습을 일러서 교육이라고 말할 수가 있으랴! 그래서 교육은 본성(本性)을 엄하게 세우고 그 본성(本性)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때에 비로소 지(知)와 재(才)와 예(藝)를 길러냈음이다.

그러나 지(知)로서 부모를 업신여기고 예(藝)로서 부모를 가벼이 여기며 재(才)로서 부모를 수치스럽다고 여기는 것은 물이 산으로 거슬러서 올라가는 것이니 이것은 천지자연의 순리에서 벗어났음이다.

그래서 사람이 천지자연의 순리(順理)를 거슬리고 어찌 인간의 본성을 온전히 보존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늘의 성(性)을 지키고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았을 때에 하늘이 내려주신 이 고귀한 생명에게 또 다른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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