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는 그 역사적 유구함만큼이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영원한 맞수로서 경쟁하면서 성장 발전하는 사이이다. 한국은 여러 번 일본의 일방적 침략으로부터 고통 받아야 했으며 많은 문화재와 국부를 피탈 당하였다.

한국은 일본의 여명기에 문화를 전달 해 주고 이끌어 준 고마운 선생과 같은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나쁜 이웃 때문에 번번히 고통을 당했으니 역사는 정의도 신도 없는 힘만이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시대처럼 느껴진다.

2천 여 년의 일본과의 교류 속에서 한 ·일 관계가 평화의 시기도 많았으나 불편한 시기도 꽤 되었다.

이러한 연유는 바로 양국의 관계가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항상 우월과 콤플렉스의 상관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239년 일본의 히미코가 여왕으로 군림하던 시기에 중국사신이 일본열도에 들렸던 바, 그 기록이 ‘삼국지’에 ‘위지 왜인전’으로 남아있다.

이 기록에 일본에는 ‘말, 소, 호랑이, 표범, 양, 까치’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239년 이전에 일본에 기마민족은 없었다는 증거가 된다.

이후 유적에는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계 마구와 유물들이 발견되니 사람의 이동은 물론 말도 함께 일본에 유입되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또한 큐-슈-의 타케하라(竹原) 고분 벽화에, 배에서 말고삐를 잡고 끌어내리는 그림이 일본열도로의 말 유입을 설명해주는 좋은 근거가 될 것이다.

일본은 고대에 한반도 국가로부터 문화를 받아들인 후 한동안 쇄국정책을 실시한다. 이때에 급속히 일본화가 이루어지고 다시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통신사의 파견 등으로 일본과 교류를 활발히 하게 된다. 일본의 이러한 문화 유입형태를 수(守)--->파(破)--->리(離)로 풀이한다.

즉, 일본은 다른 문화를 소화함에 있어 처음에는 외국문화의 원형을 그대로 답습하는 단계(고대)를 거쳐 그 원형을 깨고 더욱 발전시켜 일본인에 맞도록 고치며(중세초기), 소화단계를 거쳐 마지막에는 초기 도입된 문화의 원형을 떠나 완전히 다른 일본 고유의 문화(중세 이후)로 바뀌어 진다는 논리이다.

한. 일 관계는 고대에 한국에 의한 일방적인 우의의 시대로 1승이라 필자는 본다. 이후 10 여 차례가 넘는 통신사의 왕래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 외교 우의는 1천 여 년 이어졌다.

1592년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많은 피폐를 초래하였으나 이 전쟁에서는 양 국 모두 승자가 없었던 무승부로 필자는 본다. 이후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로부터 1945년 8월15일 까지 35년간은 일본에 패배한 시대라 볼 수 있다.

때문에 필자는 한·일 관계를 1승1무1패의 역사로 보는 것이다. 일본은 무(武)를 숭상하는 사무라이의 국가요, 한국은 문(文)을 숭상하는 선비의 국가로서 이 양자의 패러다임이 균형을 이룰 때는 평화가 있었다. 그러나 문화의 힘으로 일본을 누르지 못할 때는 일본의 무력만이 한반도로 밀려들었던 것이다.
눌려 지내던 자존심의 회복이자 콤플렉스의 극복이었다.

임진왜란, 한일합방과 같은 침략으로 앙갚음했던 것이다. 우리가 강할 때는 우리의 문화가 일방적으로 일본으로 흘러 들어간 반면, 무(武)의 국가인 일본이 강할 때는 일본으로부터 무력만이 흘러들어 왔던 것이다.

일본에서 한국에 줄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임진왜란이라는 무력과 함께 고구마, 고추, 담배 정도였다.

21세기의 한·일 관계는 이제 우리가 하기 나름이다. 돌다리도 두들겨 건너가는 일본인의 심성으로는 도저히 정보화 산업시대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21세기는 또다시 우리가 일본을 넘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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