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숙 수필가

지난해 혹독한 추위를 올겨울에도 예상하며 매스컴에선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겨울 초입에 한파가 며칠 이어졌지만, 기온은 유순하기만 하다. 매스컴의 예측으로 난방과 의류업계는 대량으로 물품들을 준비하고 소비자들에게 불티나게 팔려나가기를 기다렸지만, 물건들은 창고에서 잠자고 있는 것들이 수두룩하단다.

추운 한기를 유독 싫어하는 나로서는 순한 이 겨울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하지만 기온이 아무리 따듯해도 겨울은 겨울이다.

집 밖을 나설 때는 추위를 막아 줄 부츠, 목도리, 장갑은 내 필수 품목이다.

사철 풍성한 식재료들이 있는 시장에는 한겨울에도 철을 잊은 과일과 채소들이 가게마다 제철인양 손님을 반긴다. 맛깔 나는 색으로 손님을 기다리는 과일 가게도 심드렁하니 지나치며 입안이 싱그러운 봄 냄새를 그리워할 때면 외갓집 가듯 청남대 가는 길로 나선다.

서서히 봄의 기운에 점령당하고 있는 청남대 가는 들녘은 조용하게 바쁘다. 길가 옆 논과 밭에는 온통 비닐하우스 바다가 은빛 물결을 친다. 대청 호반과 청남대를 다녀가는 나들이객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하는 곳들은 많다.

그중에도 휴일이나 한낮 데이트 족들에게 인기 있는 장소들이 하얀 비닐하우스 속 딸기밭이다. 겨우내 추위를 이기고 자란 붉은 딸기는 비타민C의 보고다.

한때 TV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던 ‘영심이’라는 만화가 있었다. 어딘지 순박하고 촌스러운 이름의 영심이는 부르기도 기억하기도 쉬운 흔하디흔한 이름이다.

무심코 지나치다 차창 밖 길가에 ‘영심이네 딸기’라고 쓰인 현수막이 눈에 띈다. 그 친숙한 이름에 세련되고 현란한 네온사인으로 장식한 딸기 집들을 뒤로 하고, 영심이네로 향한다. 만화 속 영심이 엄마 같은 인상 좋은 할머니가 나를 반긴다. 사실 영심이는 손녀의 이름이란다. 후덕하고 장사수완이 좋은 영심이 할머니와, 우직한 농사꾼 할아버지 두 분이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계신다. 흙 묻은 작업복을 민망해 하며 할아버지는 하우스에서 연신 딸기를 작업해 오고, 다리가 많이 불편한 할머니는 지나다 들린 손님들을 상대로 딸기를 판다.

인심 좋은 할머니와 시골 서당 훈장님 같은 할아버지는 몇 년 째 단골이 돼 그곳을 찾는 나를 딸처럼 항상 반긴다. 그리곤 자신들의 먹거리들도 아낌없이 나눠 준다. 나는 두 분이 주시는 음식들을 친정 나들이한 딸처럼 늘 얻어먹는다.

값을 치르고 들고 오는 딸기바구니보다 공짜로 얻어먹고 오는 딸기가 더 많을 때도 있으니 이런 민폐 손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몇 년째 늘 자신들의 딸기밭을 찾아주는 내가 영심이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저 고맙단다.

오늘도 나는 딸기를 핑계 삼아 두 분이 베풀어 주신 시골의 인정을 배 속 가득 든든하게 채우고 돌아온다.

다가오는 올해의 봄도 별 진통 없이 수월히 지나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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