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일본에 가 보면 일본의 풍경은 언뜻 한국과 산하가 비슷해 보인다. 우리나라에 는 소나무가 많은 반면, 일본은 대나무와 삼(杉)나무가 많은 정도의 차이가 아닌가하고 생각되어지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두 나라 사이에 자생하는 동, 식물에는 실제로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일본에는 예전부터 말, 소, 호랑이, 표범, 양, 까치가 없다고 전한다. 일본에서 그림으로는 많이 즐겼지만 호랑이가 없었기에 현재도 명칭으로서 ‘쵸오센 토라(조선 호랑이)’라 칭한다.
물론 지금도 일본열도에는 동물원을 제외하고 호랑이, 표범이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에는 한국산보다 몸집이 큰 까마귀는 엄청 많아도 까치는 거의 존재하지 않기에 일본인들은 까치의 이미지를 잘 모른다. 어려서부터 못 보았으니 이미지를 잘 알 리가 없다. 겨우 큐-슈-의 사가현(佐賀縣) 정도에만 서식하며 몸집도 한국산 까치보다 매우 작다.

까치를 일본어로는 ‘카사사기’라 하나 또한 ‘조선까치(쵸오센 카사사기)’나 ‘고려까치(코라이 카사사기)’ 또는 ‘까치 가라스’라고도 한다고 한다. ‘까치 가라스’를 직역하면 ‘까치-까마귀’라는 뜻이니 ‘까치’는 순 우리말이다. 결국 일본인들은 까마귀를 통해서 까치를 인식하는 것 같으니, ‘고려’니 ‘조선’이라는 명칭이 붙는 이유일 것이다.

일본에는 원래 까치가 서식하지 않았다는 239년의 기록이 정확하다 할 것이다. 처음으로 일본에 까치가 전해진 것은 011‘일본서기’ 647년 조에 “신라의 김 춘추가 앵무새 한 쌍과 까치 한 쌍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뒷받침 한다.

까치는 신라에 있어 길조의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었고, 일본에는 없는 희귀새라는 것을 간파하고 보낸 외교적 조치로 보인다. 그런데도 현재의 선입관을 가지고 역사서의 기록을 무시하고 ‘까치’를 ‘공작’으로 풀이하는 역사학자가 많음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역사를 현대의 자의적 선입견과 해석으로 풀이함은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당시 국제적 정보전에 탁월했던 김춘추가 일본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신라에서는 흔하디 흔한 길조로서의 까치를 선물했다고 해서 이상할 게 없기 때문이다.

동 기록에 보면 671면, 신라가 아찬과 사찬을 보내 금, 은, 비단 등과 함께 물소, 말, 개(狗), 노새, 낙타를 보냈다고 나온다. 당시 신라에 물소와 낙타가 있었는지, 또는 아랍 상인들이 가져온 것을 다시 일본에 보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던 것 같다.

식물로서는 인삼과 잣나무가 일본에는 자생하지 않는다. 인삼을 ‘닌징(人蔘)’이라 하니 여기서 ‘닌징’이란 일본어로는 ‘당근’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고려인삼(코라이 닌징)’이니 ‘조선인삼(쵸오센 닌징)’이라 ‘고려’나 ‘조선’이란 국명을 표시하여 구분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열도에서 나지 않는 ‘인삼’을 처음보고 한국산 ‘빨간 당근’으로 인식했는지 그들로서는 마땅히 ‘인삼’을 표현하기가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열도는 또한 잣나무가 자생하지 못하니 ‘잣나무’나 ‘잣’을 표현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리하여 ‘잣나무’를 ‘쵸오센 마츠노 키(朝鮮松の木)’라 하고 ‘잣’을 ‘쵸오센 마츠노 미(朝鮮松の實)’라 한다. ‘잣’이 없던 나라에서 조선에서 보내졌거나 무역으로 수입되어진 것을 보고 무어라 부를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소나무와 비슷한 나무로 인식하고 이렇게 긴 설명이 필요 했던 것이라고 보여 진다. 잣이나 잣나무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가 된 느낌이다. 그러나 우리가 ‘잣’의 일본어 표기인 ‘쵸오센 마츠노 미(朝鮮松の實)’를 직역하면 ‘조선 솔방울’정도로 풀이되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JANG835@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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