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에 소아과학을 배우면서, ‘노무호기시, 노무호기시’하고 외우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이것은 영아의 정서 및 사회성의 발달에서 1세경에 나타나는 영아의 정서적인 다섯가지 기본반응을 머릿글자만 따서 붙인 이름이다. 노여움(anger), 무서움(fear), 호기심(curiosity), 기쁨(joy), 시기심(jealousy)이 그것이다. 이 중 노여움, 무서움, 호기심, 기쁨은 생후 1세기경에 나타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시기심도 있다니, 참 의아했던 기억이 있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성경에 나오는 인간사의 첫 살인사건이 바로 시기심으로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다. 가인과 아벨, 형과 동생, 인정받지 못한 자와 인정받은 자, 죽인 자와 죽은 자로 귀착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중간고리로 시기와 질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옛날에 어느 부잣집 대문 앞에 거지 두 명이 동시에 나타났다. 하나는 유명한 욕심쟁이였고, 다른 하나는 일등 가는 심술쟁이였다. 그런 줄 이미 알고 있는 주인이 이상한 문제를 거지들에게 냈다.
“너희 두 사람 중 먼저 말하지 않기로 내기를 해서, 이긴 사람에게는 갑절을 주겠네.”
욕심쟁이는 자신이 갑절을 받으려고 말하지 않고, 심술쟁이는 자기가 지면 상대가 갑절을 받을까 배가 아파 먼저 말을 못하고서 가만히 앉아있었다. 아침부터 낮까지, 다시 해질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심술쟁이가 욕심쟁이보다 먼저 말문을 튼다.
“여보쇼, 주인어른, 내 눈 하나 뽑아주쇼” 주인이 왜 그러느냐고 묻자, 심술쟁이 왈 “내 눈을 하나 뽑으면, 저 놈은 갑절이니 눈 둘다 뽑을 것 아니겠소?”
시기심. 이것은 알고보면 이처럼 우습기도 하지만, 마음 속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시기심의 발동에는 누구나 나약해질 수 밖에 없다. 오죽하면, ‘시기심은 살아있는 자에게서 자라다가, 죽을 때 멈춘다’ 는 말이 명언이 되었을까.
얼마 전 택시를 타고 가다가 기사에게 들은 얘기이다. 옛날에는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고 말았는데 요즘은 사촌이 차를 사면 교통경찰이 된다는 것이다. 나의 절망은 참을 수 있지만, 남의 희망은 참을 수 없다는 것이 맞는 말일까.
단테의 신곡에서 나오는 7가지 악행이란 탐식, 욕심, 나태, 음란, 교만, 시기, 분노이다. 이중 ‘시기’는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 재산, 소유물들을 갖지 못했을 때 가지는 감정을 말한다.
그러나 시기심에는 꼭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기’를 ‘단순한 시기심’과 ‘선의의 경쟁’으로 나누기도 했으며 이후 여러 학자들은 ‘악성적인 시기심’과 ‘양성적인 시기심’으로 나누어 보는 경항이 이다.
‘저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잃었으면’하고 바라거나 실제로 빼앗거나 갖지 못하게 하는 것과,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나도 가졌으면’ 하고 바라면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엄연히 차이가 있는 것이다.
시기심의 극복을 권하는 전문가들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 것, 나의 장점을 인정할 것,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즐길 것,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인간은 신 앞에 모두 공평하다고 한다. 또한 만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공평함이나, 평등함에 완전한 공감을 하기는 어렵다.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에 비해 좋은 외모를 타고나기도 하고, 부유하기도 하고, 좋은 머리로 태어나고, 특별한 능력을 갖기도 한다.
심지어는 특별히 ‘재수’가 좋다고 표현될 만큼, 행운이 따르는 이도 있다.
그러나 이런 차이를 받아 들이지 못하고, 이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통해 나 자신의 진정한 내면의 자유를 잃고 있지는 않은지,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힘들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 보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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