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계에서도 훌륭한 사람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정치인으로서는 일찍이 일제시대에도 중의원으로서 두 번이나 당선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박춘금으로 당시에는 재일동포들도 피선거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의 패전 후 이중적 잣대로 재일동포들을 대했기 때문에 더 이상은 정치인으로서 출세하기가 힘들었다. 중의원 박춘금도 1945년 11월 제89회 제국의회에서 가결된 중의원 선거법에 의하여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이후 오랫동안 정치인이 없었으나 천재로 알려진 아라이 쇼케이(新井將敬·한국명·朴將敬)씨가 중의원 동경 제4구 선거구에서 자민당 의원으로 그 맥을 이었었다. 토쿄대 출신으로 일본 관료중의 꽃이라는 대장성 출신 정치인 이었다.

선거 중에도 박의원 벽보에는 빨간 글씨로 ‘조센징’이라는 악의적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는 뽑혔던 것이다. 지역구민들이 재일한국인임을 알면서도 그의 똑똑함과 성실함을 인정해 준 것이다.

그러나 하시모토 총리시절 증권거래에 대한 부정의혹 사건으로 희생양이 되고 말았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인가. 결국 그는 1998년2월 자살하고 말았으니 그 충격은 엄청났다.

아직도 그가 자살하기 전 마지막으로 국회연설에서 자신이 한국계 일본인이었음을 울면서 얘기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물론 총리선까지 수사가 미칠 것이라던 일본 검찰의 엄포는 유야무야 없어지고 말았다. 참으로 묘한 사건이었다.

일본인 논픽션 작가 이시카와 요시미씨가 아사히 신문에 추도문을 기고했다.

그는 그 추도문에서 “일본의 전 총리 타나카 가쿠에이(田中角崇) 같은 사람은 록히드 부정 사건으로 옥중에 수감 중이었는데도 선거에 나오자 고향 사람들이 20만 표나 몰아주었지만, ‘품어 안아줄 고향이 없었던 아라이 씨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죽음뿐이었다’라고 하며, ‘아라이 씨의 고향은 피를 이어받은 한국도 자신이 태어나 자란 일본도 아니었다.

그의 고향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미래였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가 고향일 수밖에 없는 그런 인간은 도대체 누가 만들어 냈는가. 그것은 근대 일본이다”라고 강렬히 비판했다.

경제계에서는 IT산업의 바람을 타고 재일동포 3세인 손정의씨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고, 그 외에도 두 거인이 있으니 롯데의 신 격호(시게미츠)씨와 MK의 유 봉식 회장이 그들이다.

이들 두 사람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귀화하지 않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신격호씨는 일본과 한국에 사업을 키워 온 경제인으로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경남 해남 출신의 유봉식씨는 아오키 사다오(靑木定雄)라는 통성명을 쓰고 있지만 조국애도 대단하다. 이 사람의 지론은 항상 “친절하라”와 함께 “일본을 욕하지 마라, 욕하려면 일본인을 따라잡고 추월한 다음에 말하라”라고 강조한다. 싸움에 진 개가 메아리치듯 공허하게 크게 짓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결국 우리가 일본을 추월하거나 극복하면 일본과 대등한 외교도 가능하고 일본인도 한국인을 존경하게 된다는 역자신감의 표현이기도하다. 현재는 동생 되는 유 태식씨가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이밖에 재계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금융업계와 큰 건설업계의 큰 회사도 많이 운영하고 있다. 특히 일본 건설업의 하부구조인 함바(노동자 기숙사)운영자의 상당수도 재일동포들이다.

또한 2만여 개에 이르는 파칭코 점의 60%가 재일동포 소유라 함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며, 야쿠니쿠와 김치제조 공장도 대부분이 재일동포나 귀화한 사람들이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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