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없다구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묻는다. 처음 겪어보는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고향이 없다는 필자의 대답에 어이없어 하는 반응은 겪을 때마다 생소하기 짝이없다. 고향이 없다고 대답한 것이 성의없어 보여서인지 아니면 정직하지 못하거나 지면을 대기 거북해서인지를 가늠해보려는 표정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태어난 과정에서부터 그 이후의 인생역정(?)에 대한 진지한 설명을 듣고나서야 그야말로 고향이 없나는 말에 동의를 하는 것이다.
고향,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북에서 태어나 월남하여 학창시절을 서울과 지방에서 보내고 청년시절부터 이곳에 자리를 잡아 살고있는 70대 어른의 고향은 어디일까. 본인은 바로 이곳이 내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고향이란다.
태어난 곳과 다른 지방에서 초등학교 7개를 옮겨다니고 중고등학교는 근처 대도시에서 유학하고 대학을 다른곳에서 다니고 현재는 또 다른 이 곳에서 살고있는 필자의 고향은 과연 어디일까. 지명의 의미로서의 고향이 없나는 설명은 다시 생각해보아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마음의 고향까지도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 필자의 마음속에는 남들이 얘기하는 의미의 고향이 존재한다. 단지 주소를 댈 수 없을 뿐이다.
유독 대통령 선거철이 되면 고향에 관한 질문을 많이 받게 된다. 이것은 우리나라 특유의 뿌리깊은 지역대립정서가 정치적인 분위기와 맞물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평상시에 잘 어울려 지내고 친분을 유지하다가도 정치적 문제가 화제거리가 되다보면 상대방에게 실수하지 않기 위해 고향… 더 정확하게는 출신도… 를 확인하는 습성이 몸에 배었기 때문이다.
외국기자들은 우리의 이런 지역정서와 정치간의 함수관계를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유독 선거결과만 놓고보면 당연시한다. 만약 선거결과가 그 동안과 반대가 되거나 접전을 보인다면 그야말로 해외토픽감이라고 하기도 한다.
한 때 친구로 지냈던 파란눈의 외국인이 있었다. 그 파란 눈에도 이상하게 보였던지 느닷없이 지역주의(reginalism)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당신은 어느 지역을 선호하느냐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필자는 지역주의 자체 (regionalism itself)를 혐오한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너무도 단호해서였는지 찔끔하고는 더 이상 말문을 닫아버리던 그 친구를 기억하고 있다.
대통령 후보의 정책공약내용을 보면 향후 5년간 대략 어떠할까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특히 후보들간 남북문제 같은 것은 어느 정도 차별성이 있어서 잘 구분이 간다. 선거는 투표하는 사람들의 선호도에 따라 향후 5년의 정책을 바랄수도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정책과 상관없이 우리지역 사람으로 찍고나서 발등을 찍으면서 후회하고 또다시 반복하기를 벌써 몇 번째인가. 다른 지역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도 않은가. 지역과 고향으로 편가르기를 하면서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그 잘못을 대통령 한 사람에게만 뒤집어 씌우는 또 한번의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슴아프게도 필자에게는 지역적의미의 고향이 없다. 그러나 마음의 고향은 있다. 아담한 뒷동산과 맑은 개울, 미루나무 가로수가 줄을 지어 늘어서있고 그 사이사아로 연초록의 햇살이 간간이 내려비치는 그런 고향이 있다.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누가 그 동네에 살러 들어와도 반갑게 맞는 마을이다. 꼭 우리편이어야 한다고 우기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 고향을 찾아가는 길을 알 수가 없다. 그 길을 나에게 알려줄 사람, 누구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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