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들을 상상해 본다.
어느 식당, 부모와 함께 온 서너살 쯤 된 여자아이가 조용히 옆 테이블에 앉아서 이쑤시개와 젓가락을 모두 꺼내서 가지런히 늘어놓고 있다. 아니면, 입구 바닥에 앉아서 다른 손님들이 벗어놓은 신발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한참이나 지난 후 발견한 엄마가 화들짝 놀라며 아이를 사정없이 나무란다.
초등학교 1~2학년쯤 된 비교적 고학년임에도 불구하고 문제있는 습관적 행동을 보인다. 손톱을 2~3년간 깎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늘 물어뜯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기도 하고, 조금만 긴장해도 머릿속이 훤히 보일 정도로 머리카락을 잡아 뽑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는 분명 상상으로 시작된 것이지만, 거의 사실에 가깝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어른의 입장에서 볼 때 황당하기까지 한 이런 일들이 수도없이 많이 생긴다. 이런 것들은 어른들이 보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왜 시키지도 않은 신발정리를 하고 있으며, 먹을 것이 그렇게 많은 세상에 코딱지를 파먹을 이유가 뭐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 때 보이는 어른들의 여러 형태의 반응은 우리에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어떤 경우는 너무 심하게 나무라거나 옆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즉석에서 체벌을 가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줄 정도롤 방치해 버리는 부모들도 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예술이라고 하듯이,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얘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황에 따라 어른으로서도 처신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때 어른들이 잊지 않아야 하는 중요한 포인트는, 어린이는 어른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이것을 받아들이기에는 아무래도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소아과 교과서 첫 페이지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가 있다. ‘어린이는 작은 어른이 아니다’ 성장하고 발전해 나가는 과정 하나하나가 모두 그들의 삶이고 생활인 것이다. 이미 완성되어 있는 개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하는 얘기로 “10년만 젊었어도…” 하는 푸념이 있다. 이런 원리로 따진다면 혼나고 있는 아이들이 “10년만 더 컸어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코딱지를 먹던 아이가 10년이 지나서도 계속 그러리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지금 그러고 있는 것은 지금 그럴 수 있는 시기이고,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장래에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운전을 잘하는 사람은 없다. 운전을 가르치는 사람이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연습하는 사람에게 자기처럼 운전을 못한다고 심한 대우를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처럼 과정 중에 나타나는 문제점들에 대해 순전히 어른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과정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어른들의 자세는 너무도 빨리 결과를 알아보고 싶은 어른의 욕심때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유치원에서 초등학교로, 초등학교에서 중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아이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적지않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학기중에도 어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아주 사소한 문제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다. 스트레스가 병의 원인이 되는 경우에 부모들과 상담을 하다보면, 아이들의 스트레스에 대해 인정하지 않으려는 부모들을 만나기도 한다.
“이렇게 어린애가 무슨 고민이 있겠어요?” 라는 반문을 한다. 문제가 있는 경우에 아이들의 마음을 열게 하고 대화를 해 보면, 본인이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책까지도 알고 있는데 본인의 뜻대로 안 된다는 경우가 많다.
아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어른이 있고, 본인이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면 문제의 반은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나머지 반은 여전히 우리 사회 전체가 해결해야 할 숙제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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