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齊)나라 백성 한 사람이 유회혜(劉懷惠)라는 군수에게 햅쌀 한 섬을 선물했다. 그는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먹던 보리밥을 보여주며 ‘내 먹을 것이 넉넉하다. 이것을 가지고 나를 복잡하게 하지 말라’는 일화는 사문유취(事文類聚)에 전해오고 있다.
조선 때 명상 황희 정승도 청렴하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는 늘 헌옷을 입고 지냈다. 하루는 밤에 부인이 그 헌 옷을 빨고 있는데 입궐명령이 내려 할 수 없이 뜯어 놓은 솜을 입고 입궐할 수밖에 없었다. 왕은 그 솜이 양피(羊皮)인 줄로 알고 있었는데 뒤늦게 솜임을 알고 청빈에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연산조 때 윤석보(尹石輔)는 풍기군수로 있는 동안에 처자를 고향에 뒀다. 고향에 남아 있는 가족들이 궁색한 살림살이를 견디기 힘들었던지 그의 처 박씨는 선대부터 내려오던 물건을 팔아 밭 한 뙈기를 장만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석보는 “임금의 녹을 먹으면서 촌척의 밭을 장만했다고 하면 세상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빨리 밭을 물리라고 호통을 친 일화는 유명하다.
대제학(大提學) 벼슬인 김유(金柔)의 집은 아들이 거쳐할 방조차 없을 정도로 궁색해 처마 밑에 자리를 펴고 지새웠다. 장마철에 비가 새자 자식들이 감사로 나가 있는 아버지 몰래 반칸을 내어 지었다. 이를 안 김 유는 남이 알까봐 쉬쉬하면서 밤중에 헐어버렸던 것이다.
이처럼 옛 관료들은 적어도 백성의 생업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돈벌이마저도 기피하는 것이 바람직한 공직풍토였다.
또 윗사람이나 세도가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한 것이 삼거(三拒) 중 일거(一拒)다. 중종(中宗) 때 정붕(鄭鵬) 청송부사(靑松府使)로 있을 때 당시 영의정 성희안(成希顔)이 청송 명산인 꿀과 잣을 보내달라고 전갈을 띄웠다. 이에 정붕은 “나무는 높은 산에 있고 꿀은 민가의 벌통 속에 있으니 부사된 자가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라고 회신을 하니 영의정도 잘못을 백배사죄했다고 한다. 청을 들어준 다음 답례를 거절하는 것이 이거(二拒)다. 사육신인 박팽년(朴彭年)이 한 친구를 관직에 추천했더니 답례로 땅을 주려했으나 땅을 찾아가든지 관직을 내놓든지 택일을 하라고 일침을 놓았다. 재임 중 경조애사(慶弔哀事)의 부조를 일체 받지 않는 것이 삼거(三拒)다.
또 과거 관료사회에 청렴도를 가르는 기준으로 사불삼거(四不三拒)라는 불문율이 있었다.
부업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 일불(一不)이요, 재임 중 땅을 사지 않는 것이 이불(二不)이다. 집을 늘리지 않는 것이 삼불(三不)이요, 재임 중 그 고을의 명물을 탐하지 않는 것이 사불(四不)로 청렴한 선비들은 이를 목숨보다 더 소중히 했다.
지난 1986년 서울시가 ‘청렴카드제’를 실시하려다 공직자들의 반발과 함께 그 기준을 세우기가 어렵고 측정자체도 어려워 포기한 적이 있었다. 우리사회의 부정부패가 얼마나 심하면 그것도 국가기관이 청렴도를 측정할까만은, 부패방지위원회가 전국 기관 71개를 대상으로 청렴도를 측정, 충북공직자들이 상위권을 차지해 화제다.
김천호 충북도교육감이 취임 후 공관(일부 단체장 공관정치장화)을 찾아오는 방문객을 일체 만나지 않아 지나치다는 오해를 받은 터여서 도교육청의 청렴도 상위권공인을 계기로 김 교육감의 오해가 해소되고도 남았음직하다.
‘충북공직자의 청렴성’은 세기를 초월, 갈불음도천수(渴不飮盜泉水 비록 목이 말라도 도천의 물은 더러우니 마시지 말라)와 추호불범(秋毫不犯 청렴하여 남의 것을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다)을 벗삼아 이를 지키려는 노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을게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