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도 노인 인구가 8%(충북 10%)에 이르고 있어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황혼기 건강하고 넉넉하게 지내야 할 많은 노인들이 자식에게 버림을 받은 채 내몰리고 끼니조차 굶는 노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는 부모님이 젊은 날 허리가 휠 정도로 자식 뒷바라지 한 은고(恩顧)는 까맣게 잊은 채 이 세상을 사는 것이 마치 제 잘 난 탓으로 치부한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혈연관계라는 의무감 이외에는 더 이상 가까이 할 수 없는 먼 남이 돼 버렸고 살아 생전 자식의 기다림으로 점철됐던 부모님이 세상을 등지고서야 후회하기 마련이다.
노인들은 가족들이 모두 떠나간 공허함은 물리적인 벽보다 더한 정신적인 차단공간으로서 처절한 외로움을 겪게 마련이다. 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고독과 소외감에 대한 공포라고 한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노인들은 고독은 점진적으로 육체를 파멸시키는 ‘독약’인 것이다. 그래서 노인들에게 있어 최후의 욕망은 식욕(食慾)과 성욕(性慾)과 더불어 가족과 함께 있고 싶은 집단욕(集團欲)이라고 한다.
일찍 배우자를 잃은 노인들은 고독과 상실감에서 더더욱 벗어나기 어렵다. 경로당과 공원의 왕래조차 없는 노인들은 금새 세상을 등지기 마련인데, 이들은 고독과 소외감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주원인이다.
이런 점에서 문호(文豪) 괴테는 80세가 넘어서 자신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가족을 자신이 곁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은 처절하기만 하다. 그는 집안의 모든 식품 창고와 식기찬장의 열쇠를 만들어 자신의 베갯속에 숨겨뒀다고 한다.
밥 매끼니때마다 그 열쇠를 얻어야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 가족들이 찾아오지 않으면 안됐던 것이다. 적어도 식사 때마다 가족들과 어울림으로써 절망과 공포에 가까운 외로움을 발산시키려는 최후의 발악이었던 것이다.
우리 주변에 금실 좋은 노부부 중 어느 한쪽이 먼저 죽게되면, 의지할 대상이 없어지므로서 나타나는 상실감이 눈덩이처럼 커진 노인들은 절망감에 빠져들어 얼마 되지 않아 그 다른 한 쪽도 곧 세상을 등진다.
나치 수용소에 가족·친지와 격리 수용된 노인은 격리된 지 며칠만에 죽게되고 할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할아버지가 그 며칠 사이에 여지없이 죽었다는 것이 정신의학자 프랑클의 경험 필이다.
즉 의지할 대상이 없어진 노인들은 고독은 곧 독약으로 나타난다. 노인들에게 격리되더라도 집단생활을 통해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생명을 연장(延長)해주는 정신건강의 묘약이 되는 셈이다.
한 쌍의 동물도 오랫동안 함께 지내다가 둘 중 한 마리가 죽게되면 나머지 한 마리는 상실감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자학하기 마련이요, 시름시름 앓다가 곧 죽게된다는 것이다. 하물며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의 강도는 상상을 초월하고도 남을 듯 싶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인지 어버이날이 통과의례로 고착화 된 느낌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후닥닥 부모님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돈 몇 푼 손에 쥐어주고는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죽고 난 다음 수백만원 짜리 수의(壽衣)를 입힌들, 20만원 짜리 굴비를 제사상에 올린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말벗이라도 돼 주는 것이 최소한의 자식도리요, 효(孝)라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잊고 살고 있는 것이다.
백발의 주름이 가득한 어머님이 허리가 나오도록 치마를 끌며 마을 어귀에서 자식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또 바라보던 그 모습이 오버랩 돼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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