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5월이면 열리던 전국연극제가 올해는 월드컵과의 중복을 피해 9월말부터 10월까지 열리게 되다보니 충북연극제 역시 8월말에야 열릴 수 있었다. 청주 두 극단과 충주 한 극단등 3개 작품만이 경선에 참여했으니 충북연극제가 예년에 비해 초라해진 것 아니냐는 비판의 소리를 듣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작품의 질적 평가가 좋았다면 양적 축소야 별문제가 아니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질적인 면에서도 그리 좋은 평가를 얻지 못해 협회장 입장에서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지방연극 활성화를 목적으로 전국연극제가 시작된지 올해로 20년이니까 충북연극제 역사도 어느덧 20년이다. 성년으로 성장할 역사를 가졌음에도 충북연극은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염려가 기우가 아닌 현실임을 안타깝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대학때부터 연극한다고 돌아다니던 아들 때문에 한숨짓던 우리 어머님은 충북연극협회 회장인 당신 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네 후배들 연극하지 말라고 말려 ”. 연극 현실을 이보다 더 명확히 진단할 수는 없을 것 같다.

20세기 끝무렵부터 산업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어 왔다. 자본을 투자하여 생산시설을 구축하고, 인력을 고용해서 상품을 생산하고, 이를 유통시켜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산업이다.

그러므로 자본,인력,시설은 산업의 근간이며 그중의 제일은 자본이다. 자본을 투자하여 연기자와 스텝을 고용하고 연극이라는 상품을 생산하여 극장이라는 유통공간을 통해 수익을 얻고자 하는 면에서 연극을 포함한 공연예술은 산업시스템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연극의 4대 요소(희곡,극장,배우,관객)속에는 자본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연극을 포함한 어떤 예술도 (영화는 예외일 것이다) 자본을 예술창작의 필수조건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귀족이나 왕실 혹은 교회의 후원을 통해 이루어져 온 서구예술이 자본의 필요를 역설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태리 중부의 소도시 피렌체가 르네상스 예술의 시작지이자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같은 천재적 예술가가 태어나고 활동한 고장이기문이기도 하지만 메디치가(家)의 경제적 후원이 주요한 동인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밀라노의 두오모 대성당이나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과 같은 엄청난 건축예술이 가능했던 것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같은 천재 예술가의 능력과 교회의 자본 투자가 결합된 결과이다. 모차르트가, 몰리에르가, 세익스피어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1+1을 원하는 자본은 속성상 그 흐름이 일방적일 수 밖에 없다.

재화의 일방적 흐름과 소유를 최소화하고 인위적으로 균등한 재화의 분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세금제도, 의료보험제도, 국민연금제도, 문예진흥기금, 중소기업 육성기금 조성과 같은 정책들이다.

사회보장제도가 최고로 발달한 서구 몇몇 국가에서 사회보장제도에 의한 자본의 분배는 여성을 남성의 경제적 구속으로부터 독립시키고 있다. 이혼여성이든 미혼모든 아이를 양육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남성은 생물학적 차원일 뿐, 양육이라는 경제적 차원의 아버지 역할은 국가가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자본의 자발적 흐름이 연극에까지 이르기를 기대하기가 요원한 이상 자치정부와 중앙정부가 공공기금 조성을 통해 연극을 양육하는 아버지가 되어야 할 것 같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연극을 포함한 예술이 존재하지 않아도 생활하는데 불편함을 느끼거나 곤란을 겪지 않을 것이다.

축구나 야구가 없어도 허기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배가 차고, 성적 만족이 있고, 여흥을 즐길 수 있다는 것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 생물학적존재가 아니다. 유사 이래로 끊임없이 예술활동이 이어져온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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