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개발이 한창이던 1960년대 후반의 일이다. 어느 시골 사람이 강원도 전방으로 군대간 아들 면회를 다녀 온 뒤로 목에 상당히 힘이 들어갔다.

이를 본 이웃 친구가 그 연유를 물었더니 그 시골 사람이 말하기를 “앞으로 이장, 통장은 일하기 힘들 것이여”라고 했다.
왜 그러냐고 다시 물으니까, “우리 아들이 헌병인데 손만 들면 집채만한 쇠구루마가 그 앞에서 턱턱 선당께”라고 하더란다. 아마도 그 집 아들이 군대가서 헌병이 되어서 부대 인근에서 교통 정리했다.

매사 절제 분수 알며 살아야

정지 신호를 보내니까 트럭이 정지를 하는 것을 보고 아들이 상당히 출세한 것으로 알고 그 시골 사람이 자랑 겸 유세 겸 거들먹거렸던 것이다.

윤흥길씨가 쓴 ‘완장’이라는 소설이 있다. 시골의 한 무지랭이 청년이 어느 날 저수지 낚시터 감시원이 되었는데, 감시원 완장을 차고 저수지에 낚시하러 오는 사람들을 단속하다가 완장의 마력에 취하게 되고, 결국에는 자신이 엄청난 존재인 줄로 착각하다가 파멸하게 된다는 줄거리다.

두 이야기는 모두 우리들에게 무슨 일에서건 절제와 분수를 알고 행동해야 된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이제 정상화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철도 공무원들의 파업사태를 보면서, 지난번 화물연대의 파업사태의 모습과 너무도 똑같음에 시민들은 걱정과 함께 개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휘두른 휴대용 플래카드에 쓰여진 구호도 화물연대들이 외쳤던 ‘물류를 멈춰서 세상을 바꾸자’처럼 ‘철도를 멈춰서 세상을 바꾸자’였다.

그러나 이들이 외쳤던 세상 바꾸기는 불행하게도 실현되지 않았고, 시민들의 차가운 시선과 법대로 응징하라는 등돌린 여론만 보게 되었다.

여론의 힘을 받은 정부는 법과 원칙을 강조하면서 지금 이들을 징계할 수순을 밟고 있다.
세상 바꾸기는 소위 혁명을 하자는 것인데 지금의 우리 사회가 혁명을 해야 할 만큼의 상황에 놓여 있는가 하는 것이다. 또 누구를 위한 세상 바꾸기인가라는 의문이다.

지난 대선에서 진보 성향의 청년층과 노동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탄생한 현 참여 정부는 그래서 노동자들에게는 기회이고, 완장을 차게 한 것이나 진 배가 없는 꼴이 되었다. 노동자들의 구호에서 ‘세상 바꾸자’ 라는 말이 그런 연유로 자연스레 나오게 되었고, 그런 추세로 지금 우리 사회는 도처에서 쟁의와 파업에 몸살을 앓고 있다. 뉴스 화면은 연일 노동자들의 시위와 파업으로 어지럽다.

눈길을 돌려서 우리의 경제를 한 번 살펴보자. 참여정부의 아마추어적 시행착오가 계속되면서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다. 정국은 불안정하여 국민들이 전에 없이 불안과 걱정 속에 생활을 하고 있다.

지금 우리 나라의 굴뚝산업들은 중국으로, 동남아로 옮겨가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근로자들이 일할 곳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도 노조연대들의 시위는 연일 계속되고 있다. 문닫은 공장을 보고 세상을 바꾸자고 외쳐본들, 그 소리는 그냥 메아리만 될 것이다.

맹목 파업 발 못 붙일 현 사회

윤흥길씨의 소설 ‘완장’을 새삼 떠올리는 이유는 낚시꾼이 오지 않는 낚시터에서 관리인 완장을 차고 아무리 거드름을 피운들 누가 알아줄 것이며, 낚시터 관리비를 누가 낼 것인가 생각해보라는 뜻에서이다.

또, 세상을 바꾸어서 대박을 얻으려 하다가 오히려 모두 쪽박차기 십상인 것이 우리 사회의 현재 모습이고, 우리 사회의 미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철도 파업으로 세상이 바뀔 만큼 그렇게 허술하거나 녹녹하지 않다는 사실이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서원대 수학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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