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직장에서 일을 하는 자세나 태도가 제 각각이다. 아주 성실히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물론 일하는 자세에 따라 그 성과 또한 천차만별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옛날 예루살렘의 큰 성정 앞에서 세 사람의 석수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날마다 열심히 돌을 쪼개고 갈고 닦고 다듬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부를 많이 한, 현자(賢者)가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나란히 앉아서 일하는 세 목수를 목격하게 된 그 사람은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겨서 첫 번째 석수에게 물었다.

일에 임하는 자세 각각 달라

“여보 석수 양반,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날마다 돌을 다듬고 있소?” 이에 그 석수는 “별 수 있나요? 배운 도둑질이 이것뿐이니… 이젠 돌만 보아도 지긋지긋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 현자는 마음이 언짢았다.

두 번째 목수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 목수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잖아요? 처자식과 함께 먹고살자니 이 짓이라도 해야지 어떻게 합니까? 싫으나 좋으나 팔자 소관인 걸요.”

두 번째 석수의 대답도 그 현자의 마음을 우울케 할 뿐이었다. 세 번째 석수도 마찬가지 이겠지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고 질문을 던져 보았다.
그는 앞의 두 목수와는 달랐다. “선생님 저는 이 일이 좋아서 합니다. 남 보기에는 어줍잖게 보일지 모르지만 저는 이 일보다 저에게 걸맞는 일이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세 번째 석수의 말이 계속 되었다.

“저는 휴일이면 가족과 함께 예루살렘 시내를 여기 저기 다녀 봅니다. 그러면 제가 다듬은 돌들이 때로는 성전 모퉁이 돌이 되어 있기도 하고, 때로는 훌륭한 사람의 비석이 되어 있기도 하지요. 저야 보잘것 없는 존재이지만 제 손으로 다듬어진 돌들이 오래 오래 남아서 제가 해 놓은 일을 증명해 줄 것을 생각하면 보람과 긍지를 느낍니다. 저는 이 일이 좋습니다” 라고 했다.
그 현자는 “세상은 역시 살만한 가치가 있구나”하며 흐뭇해 했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일반적으로 사람이 일하는 자세를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첫째는 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마지못해, 할 수 없이 억지로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지겨운데 죽지 못해 한다 고나 할까. 그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증오나 오기가 가득 차 있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다.
그렇게 되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해치우거나 어떻게든 안 하게 되는 것이 최선이라는 심리가 바닥에 깔려 있어 일에 성의라든가 정성이란 아예 없기 마련이다.
두 번째는 돈벌이가 되거나 눈에 보이는 이익이 있어야만 열을 내는 것이다. 경제적이며 물질적인 수지타산이 맞지 않을 때에는 인정 사정없이 냉정하고, 무감각하다가도 일단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자비는 이익이 예상되면, 물불 가리지 않고 마구 덤비는 유형이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근대화된 합리적 사고의 소유자라 볼 수도 있다. 아무 소득이 없는 멍청이 짓은 절대로 하지 않는 똘똘한 사람이다.

셋째는 좋아서, 그저 좋아하기 때문에 일하는 그런 유형이다. 할 수 없이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무슨 구체적인 이익이 있어서만 하는 것도 아니다. 매력을 느껴서 또는 적성이나 심성에 맞아서 하게 되는 것이다.

정성, 최선다해야 열매 열려

그래서 열심히 하게 되고, 정성, 성의, 최선을 다 하게 된다. 보람과 긍지와 희열이 느껴지는 것도 결국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그저 앞 뒤 가리지 않고 정성껏 몰두하는 데서 나오게 되는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우리가 하는 일에서 보람과 긍지를 느끼고 그래서 정성과 최선을 다하게 될 때라야 정직, 근면, 성실 창조와 같은 열매가 열리고, 행복과 성숙이 이루어지며, 그런 사회래야 발전 번영이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다.

(청주대학교 겸임교수/birdie20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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