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이야 나이 60을 청춘이라 일컫지만 예전에는 60을 넘기가 쉽지 않았는 데, 고려시대에는 먹을 것이 없어 나이 60이 되면 그 노인을 버리는 고려장이라는 풍습이 있었다. 그 때의 일화에 이런 것이 있다.

60세가 되어 고려장을 치러야 할 노부를 둔 사람이 차마 자식으로서 부친의 고려장을 치를 수 없어 남몰래 집에 숨겨서 모시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고을 원님이 고을 백성들에게 ‘재(灰)로 새끼를 꼬아 오라’는 방(榜)을 써 붙였다.
건드리면 가루로 부스러지는 재를 가지고 아무도 새끼를 꼴 수 없었다.

40·50대 퇴직 사회적 고려장

효성이 지극한 그 사람도 고민을 하다가 집에 몰래 모시고 있던 부친께 이를 여쭈었더니 그 노인이 이르기를 ‘먼저 새끼를 단단히 꼰 다음 그것을 조심스레 태워서 가져가라’고 일러주었다.

그 노인의 지혜로 재로 만든 새끼를 가져간 아들은 원님으로부터 후한 상을 받았고, 사실인지는 몰라도 그 얘기가 널리 전해 줘서 고려장의 관습이 없어졌다고 한다.

오직 경제 논리만 최고의 선으로 보는 요즘 사회에서,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40·50대의 모습에서 우리는 고려장보다도 더한 현대판 사회적 고려장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다양성을 요구하는 요즘 사회에서는 각각의 연령층이 어우러져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야 우리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사회는 능력보다는 연령 때문에 40·50대가 직장 조직에서 밀려나고 있다.
신판 21세기의 사회적 고려장이 자연스레, 그리고 당연한 시대의 대세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45세 정년을 뜻한다는 ‘사오정’과 56세까지 직장에서 버티면 도둑놈이라는 뜻의 ‘오륙도’는 우리 사회의 살벌한 단면을 보여주는 용어가 되었다.
지난 대선 이후 우리 사회의 40·50대는 주류의 대열에서 밀려나고, 소위 386세대가 주도세력으로 바뀌고 있지만, 이들이 사회적 분위기를 신선하게 변화시키기는 커녕 정치판은 경솔함과 무원칙과 즉흥성과 경거망동이 어우러져, 무격식과 함께 권위까지 해체되어 국가적 리더십이 실종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5년 전 ‘국민의 정부’ 초기에 노령교사 한 명을 내보내면 젊은 교사 두 어명을 쓸 수 있다는 단순한 산술적 논리를 근거로 교사의 정년을 단축하여 교육현장을 혼란으로 빠뜨린 기억이 생생하다.

아직도 우리 교육 현장은 그 후유증으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교육현장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모두가 이런 경제 논리로 나이든 사람을 밀어내는 살벌한 곳이 되어가고 있다.
고려 때의 이야기처럼 노인의 지혜를 아무도 못 따라오듯이 20·30대의 젊음만으로 40·50대의 신중함과 깊이 있는 판단을 따를 수는 없는 것인데, 한참 일해야 할 40·50대가 맥없이 밀려나야만 할 사회라면 그 사회는 경륜도 없어지게 될 것이고 삶의 지혜를 축적할 수도 없고 희망도 없는 사회가 될 것이다.

물론 20·30대가 가질 수 있는 창의력, 활동력 등에서 40·50대나 노령 층이 뒤질지는 모르겠으나, 젊은이들은 노·장년 세대의 노련함과 경험적 지혜를 따를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노·장년 경험 살릴 수 있어야

나이 30에야 인생의 모든 기초를 세우고 (而立), 40에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으며(不惑), 50에 하늘의 뜻을 안다(知天命)고 했던 선인들의 세상을 보는 나이 눈 높이가 요즘이라고 달라질 게 없는데도, 우리 사회는 너무 스스로 우리를 학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스개 소리라도 서글픈 사오정과 비참한 오륙도가 더 이상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서원대 수학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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