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의 ‘보시’는 인색하지 말고 베풀라는 말로서 불자들이 꼭 닦아야 할 수행덕목 중 가장 중점이 되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시주’란 사찰의 운영과 스님들의 생활유지에 중요한 수단인 보시를 행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는데 지금은 시주가 보시하는 행동자체를 뜻하는 단어로 통상 쓰여지고 있다.
새삼스럽게 보시와 시주의 의미를 짚어보는 이유는 전 공정거래위원장이 SK측에 외압을 행사하여 자신이 다니는 비구니 사찰에 10억 원을 시주토록 했다는 검찰 결과 발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수뢰사건이 아닌 제3자 뇌물수수라는 특이한 죄명의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의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된 전 공정거래위원장은 ‘사찰의 개·보수에 필요한 기부를 해달라는 것이었을 뿐 공정거래위원회의 직무와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검찰 측은 뇌물을 직접 받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과 특수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나 단체에게 이득을 주기 위해 압력을 행사했다는 혐의를 두고 공정위원장을 구속한 듯 하다.
검찰 조사 결과 이 전위원장은 SK회장이 ‘대기업이 특정 사찰에 기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시주 요청을 거부하자 본부장에게 독촉전화까지 걸었다고 한다.
권력기관장의 부적절한 처신이라고 지탄받을 수 있는 사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청탁이 가능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시주를 받는 방식인 화주(化主)시주를 했던 이 전위원장은 분명 불심이 남다른 신도였을 것이지만 화주로서는 평범하지 않은 그의 위치가 충분한 오해와 시비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간과했었던 것 같다.
이번 시주사건으로 편치 않은 입장이 된 사찰관계자와 조계종은 ‘시주 금이 모두 건축자금으로 사용됐으며 SK 명의로 기부금 영수증 처리를 해주었다’고 해명하며 검찰의 제3자 뇌물운운은 말이 안 되느니 만큼 법무장관과 검찰청장의 공식 사과가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가장 큰 선행인 시주가 법의 심판대 위에 오르게 된 것이 역설적이지만 순수한 보시로서의 시주행위는 어떤 종교적 가르침보다 신성한 것이다.
보시는 물질적이거나 눈에 보이는 것 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베품 까지도 강조하고 있는데, 상대방에게 물질을 베푸는 것을 재보시(財布施)라 하고 가르침을 베푸는 것을 법보시(法布施)라 하며 두려움을 없애고 마음에 안정을 시키게 도와주는 것을 무외시(無畏施)라고 한다.
베푸는 방법 또한 중하게 여겨 베푸는 사람과 베품을 받는 사람과 베풀어지는 물건이 모두 깨끗하고 평등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베푸는 사람인 시주자가 그 행위에 상을 바라거나 집착하거나 분별심을 잃지 않을 것을 주의시키고 있는데 체면을 생각한 보시나 칭송을 듣기 위한 보시는 당연히 공덕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처음 도착하여 양 나라의 황제인 무제를 만나게 되었을 때, 수많은 불사를 직접 일으켰을 만큼 신실한 불자였던 양 무제는 달마대사에게 자신의 공덕이 얼마나 될지를 자랑스럽게 물었다.
달마대사는 양 무제의 불사가 남에게 자랑하기 위한 대가성의 시주이기 때문에 허공처럼 탁 트여있을 뿐 성스러운 것이 없어 공덕 또한 없다는 대답을 했다.
누구보다도 보시를 많이 했다고 자부했던 양 무제는 달마대사의 말에 매우 불쾌해 했으나 그의 공덕이 허공과도 같다는 예언대로 말년에 망령이 들어 아들에게 왕위를 뺏기고 굶어 죽는 비참한 처지로 떨어지고 말았다는 일화도 전한다.
SK그룹의 10억원 시주처럼 거액의 현금시주는 흔치않은 일이지만 간혹 거액의 부동산시주가 매스컴을 장식했던 기억이 있다.
신화적인 시인 백석의 연인이었던 김영한 할머니가 천억 원대의 부동산인 서울 성북동의 요정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해 화제가 되었었는데 지금 길상사로 변한 이 시주물은 드라마틱한 건물의 역사성 때문에 앞으로도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거액시주 요구로 물의를 빚고 있는 이 전 공정거래위원장은 매일 108배를 드렸을 정도로 불심이 깊었던 불자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독실한 신심을 높게 사서 이번 사건을 재벌그룹에 사심 없이 청했던 순수한 시주부탁이었다고 무마하기에는 논리적인 설득력이 없다.
우선 시주를 했던 대그룹이 자신의 이권에 위협이 되지 않았다면 계열사의 자금까지 동원해 그토록 선선히 기부행위를 할 수 있었을 지를 묻고 싶다.
시주자나 시혜자나 시물이 모두 청정할 것을 강조하는 불경의 가르침에 진정 부끄러운 마음이 없었는가 이 전위원장은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할 것이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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