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이 온 나라의 교육계를 술렁이게 하고 있다. 교장에게 차 한잔을 부탁 받은 여교사가 차 심부름이 여성교원에 대한 성 차별적 업무강요라고 반발하면서 파생된 후 급기야는 학교장의 자살사건으로까지 비약돼 충격을 준 교단 내 사건을 지켜보며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계급으로 나뉘어진 종적인 관계가 아닌 자격으로 이루어진 횡적인 관계가 대체적인 교단의 분위기라 이해할 때 과격한 개선투쟁으로 까지 갔어야만할 만큼 선배에게 부탁받은 차 한잔의 심부름이 치욕적인 것이었나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더구나 숨진 교장은 젊은 여교사가 다녔던 초등학교의 교사였다니 담임 교사는 아니었다 해도 모교에 재직했던 어릴 적 은사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차 한잔도 드릴 수 없는 각박한 세태가 무겁기만 하다.
차 한잔의 부탁을 여성억압이라고 반발한 여교사는 급진적인 페미니스트가 아닌가 싶다. 이미 올드 패션이 되어 그 느낌이 시들해진 페미니즘은 19세게 중반에 시작된 여성 참정권 운동에서 시작돼 여성 억압의 원인과 상태를 기술하고 여성해방을 궁극적 목표로 했던 이론이다. 페미니즘의 시초는 자유주의인데 여성의 사회진출과 성공을 가로막는 관습적 법적 제한에 대해 반발했다. 특히 급진적 페미니즘은 가부장제에 지배되는 사회 문화적 제도가 여성 억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여성의 생물학적 정체성의 억압에 중요한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여성교원에 대한 성 차별적 업무강요는 있을 수 없으며 가부장적이며 봉건적인 직장의 봉건적 문화풍토는 사라져야 한다는 여교사와 전교조의 주장이 시대를 거슬러 19세기의 페미니즘 문화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2003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니콜 키드만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던 영화 ‘디 아워스’는 페미니즘 문화의 선구자인 버지니아 울프를 재조명해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주변환경과 여성으로서의 자아에 대해 고뇌했던 버지니아와 주변의 두 여인이 여성억압으로부터 해방돼 자유를 얻는 법이 이 영화의 주된 줄거리다. 버지니아는 거의 자연사할 늙은 나이에 자살을 택했고 두 번째 여인인 로라는 둘째 아이를 출산하자마자 가족을 떠났으며 마지막 여인 클라리사는 남편에 의해서 간접적인 자유를 얻는다.
자신의 자아를 위해 자식과의 고리마저 끊어버린 비정한 여인으로 그려진 로라는 결국 가족에게 외면당하고 깊은 고독의 수렁으로 떨어지지만 그녀는 그녀가 택한 삶을 후회하지 않는 당당함을 보인다.
여성이 자신만을 위해서 가장 이기적일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찾을 수 있다고 역설하는 이 영화의 주제는 참다운 여성성의 해방을 위해서는 혈연조차도 뿌리치고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페미니즘의 어원이다. 페미니즘(feminism)은 여성(female)에서 가지가 쳐졌다. 남성(male)이 아닌 것이 여성(female)이니 페미닌(feminin)은 여성스러움이고 페미니즘(feminism)은 어원으로만 살피면 지극히 여성스러움을 높이 사는 사상인 것이다. 즉, 단어의 뜻만으로 이해한다면 페미니즘은 성별특성을 강조해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여성만이 가지고 있는 부드러운 여성 성을 옹호하고 예찬하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페미니즘을 주창했던 빅토리아시대 때의 사람인 버지니어 울프가 그로부터 거의 1세기 반이 지난 현대에 다시 출현했다면 그의 여성 해방관이 어떻게 바뀔 수 있을지 궁금하다.
여성에게도 남성과 동등한 교육기회와 시민권이 주어져야만 남성과 여성의 주종적인 종속관계가 해소될 수 있다는 19세기의 이론이 지금은 생소하기만 한 외침이기 때문이다.
남성우월사상이 어느 나라보다 더욱 지배적이었던 우리나라에도 현대에 이르러서는 남성과 여성이 균등한 교육기회와 사회참여기회를 부여받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여성의 사회진출이 남성보다 다소 제약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고 몇몇 직장 내에서의 성차별도 개선돼야 할 현안이 되고있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이 성의 특수성 때문에 가정이나 사회에서 억압을 받는 경우는 거의 생각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이제 여성은 자신이 남성에 의한 상대적 약자이며 피해자라는 닫힌 마음을 열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을 따지기 전에 동등한 인간으로서 서로의 성을 이해한다면 생물학적인 약자로서의 피해의식도 없을 것이다.
보성초등학교의 갈등 역시 차 한잔의 심부름이 가부장적인 관념에 사로잡힌 남성에게 강요된 것이 아닌 후배가 삶에 지친 선배에게 따뜻하게 전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심각한 아픔으로 남지 않았을 것이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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