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부터 우리 나라는 도토리와 기근(饑饉)과 깊은 함수관계가 있다. 또 기근과 밀접하기에 서민들의 애환이 물씬 묻어 나는 것도 역시 도토리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는 7년을 주기로 가뭄이 들거나 난리·재난 등 국가의 위기가 올 정도로 기근이 주기적으로 닥쳐왔기 때문에 도토리는 중요한 식량자원의 대용식품이었다.

동문선(東門選)에 윤여원(尹汝衡)의 상실가(橡實歌를)에는 한 농부가 권세 가지 사람, 돈 많은 사람, 탐관오리에 수탈 당하는 과정을 읊고 있다. “늙은이만 남아 빈집을 지키다 사흘을 굶다 못해 도토리 주우러 산으로 간다/ 권세가여 그대는 아는가/ 그대의 미반상찬(美盤上餐)이 도토리 줍는 늙은이 눈 밑에서 스며 나오는 피라는 것을…”이라고 적고 있다.

게다가 탐관오리라는 인재(人災)까지 가세하였기에 기근을 구제해주는 도토리까지 없었다면 우리 역사는 크게 달라졌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을 정도다. 과거 고을 수령(守令)이 부임하면 가장 먼저 도토리 나무를 심었는데 이것은 주기적으로 가뭄이나 난리를 겪은 후 닥치는 기근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중국 한문공(韓文公)은 산둥성(山東省)을 다스릴 때 기근에 대비하기 위해 산이라는 산은 모조리 도토리 나무를 심고 기근을 대비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도토리 나무를 일컬어 ‘한목(韓木)’이라고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전국 산골짜기마다 도토리 나무를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널려 있는 것은 한문공의 덕이다. 또 도토리묵 집은 한문공이 노력이 없었더라면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이어나가기 어렵다는 점에서는 매년 공자의 뜻을 기리고 제를 올리는 것처럼 한문공을 기리는 제라도 지내야 하지 않을까.

옛 문서(實學書)에는 어김없이 도토리에 관한 문헌이 많은 것은 기근에 중요한 식량으로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도토리껍질을 벗겨 낸 다음 물에 오랜 시간 동안 담가놓았다가 떫은맛을 제거하고 말린 후 가루를 내는데, 그 가루로 죽을 쑤면 도토리 죽이 되고, 떡을 만들면 도토리면, 밀가루와 섞으면 도토리국수, 꿀에 재면 도토리다식(茶食), 묵을 쑤면 도토리묵이 된다고 적혀있다.

이처럼 도토리가 어떻게 기근을 면하는가에 대해 쓰여 있는 것을 보면 도토리는 서민들의 기근을 구제하는 가장 소중한 식량임은 틀림이 없다.

흥미로운 것은 목수들이 아무리 거목(巨木)이라도 도토리 나무는 재목으로서는 아주 쓸모 없고 가치가 없는 나무이기에 거들떠보지 않는다. 예컨대 배를 만들면 물이 먹어 가라앉고, 기둥을 만들면 허약해 비틀어지고, 관을 만들면 쉬이 썩고, 자루를 만들면 부러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도처에 도토리 나무가 널려 있는 것은 재목으로서의 가치가 없기 때문에 그 수가 엄청나게 늘어나게 된 것이다. 만약 쓸모 있는 재목이었다면 목수들이 그냥 둘 리 없기 때문에 도토리 나무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도토리 나무를 두고 장자(壯子)는 “도토리 나무처럼 적당하게 쓸모 없어야 크고 장수할 수 있으며 재기가 넘쳐 쓸모가 많으면 일찍 베임을 당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을 보면 역시 현대 사회에서 약삭빨른 인간군상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도토리는 참나무과, 특히 졸참나무속(상수리나무·떡갈나무 등) 식물 열매의 총칭이며 영명은 acorn이다. 도토리 특유의 쌉쌀한 맛은 바로 우리 고향의 맛으로 향수를 느낄 수 있고 도토리 1Kg에서 추출한 아콘산은 중금속에 오염된 폐수 3.5t의 양을 정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또 도토리 속에 함유되어 있는 아콘산은 인체 내부의 중금속 및 여러 유해물질을 흡수, 배출시키는 작용은 물론 피로회복 및 숙취에 탁월한 효과가 있고 소화기능을 촉진시키며 입맛을 돋구어 주기도 한다.

특히 도토리는 장·위를 강하게 하고, 설사를 멎게 하며, 강장 효험을 볼 수 있고, 당뇨·암 등 성인병 예방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 도토리가 기근을 구제하는 대용식품이었다면, 현대사회에서는 고향의 맛과 향수를 느끼고 건강·장수식품, 환경오염을 정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7년을 주기로 흉년이 들거나 난리·재난이 든다는 점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도토리가 풍년인 것을 보면, 올해는 흉년이 든 것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태풍 ‘루사’가 휩쓸고 간 영동·옥천 지역 수재민들의 참혹상이 연일 보도됐다가 오송 국제 바이오 엑스포의 관람열기 등에 뒤덮인 채 세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어 안타깝다. 최근 도지사와 도의회의장 등 충북도내 지도급인사들이 수해지역을 방문했다는 소식이 좀처럼 들리지 않고 있다.

지금 전국의 산에서는 도토리 줍기에 한창 여념이 없지만, 수재민들의 고통을 헤아려 도토리 줍는 손길이 수해 현장에서 곡식낱알을 줍는 손길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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