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제천은 선사시대부터 한반도 중앙 심장부로 중부권 문화를 일궈왔던 지역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중앙선 철도가 들어서면서 도시 형성을 갖춘 것으로 시민 대부분이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다.

선사시대의 생활·문화적 흔적은 제천 지역의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제천시 청풍면 진목·황석·양평리 등지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출토됐다. 또 계산·양평·황석·방흥·진목·사기리 등지에는 신석기부터 청동기·철기시대의 유물들이 한꺼번에 출토됐다.

제천시 송학면 포전리 용두산 기슭의 점말동굴에서도 구석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 등이 발견되면서 현재 제천지역 전체가 선사시대의 생활터전이었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삼한시대로 접어들면서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접경지였던 제천지역은 영토확장을 위해 반드시 제천지역을 교두보로 확보해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통일신라때는 경순왕의 이궁이 들어설 정도로 독자적 도시형태와 규모를 유지했다. 고려시대때는 거란과 몽고군의 침임을 막아내는 마지막 방어선 역할을 한 중용한 지역이기도 했다. 몽고의 침입 당시는 제천지역 주민들이 별기군을 조직해 대응,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조선시대로 들어서면서는 국토의 중심부인 제천은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에 상·공업이 발달되면서 화전에 의존하고 있던 농업인구가 현으로의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상당한 규모의 도시 형태를 갖춘 것으로 나타났다.

영조 36년(1760)에는 제천현에 거주한 호구수는 2천673호에 1만1천141명이, 청풍부에 거주한 호구수는 2천363호에 6천291명이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제천은 한반도 심장부 역할을 해 온 것이 역사적 사실에서 입증되고 있다. 제천시민 한 사람으로서 제천에 대한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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