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이별이었다.
죽음에 따른 이별 치고 애통하지 않은 이별이 어디 있을까만 한창 일할 나이인 50대에 말없이 세상을 떠난 한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과의 이별은 정말 남다른 아픔이었다.

흔치 않은 담낭암(膽囊癌)이라는 판정을 ‘정식으로’ 받은 지 4개월, 교감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마지막 정렬을 불태우던 교정을 한 바퀴 돌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났다.

투병 기간 중에도 치료는 뒷전으로 하고 툭하면 학교에 나가 근무하던 남편을 원망하던 미망인의 울부짖음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다. “학교에 무슨 미련이 그리 많아서....”
학교를 떠나면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것일까. 자신의 생명보다 학교가 그렇게도 좋았던 것일까. 이제 그 답은 영원히 들을 수 없게 돼 버렸다.
은행에 가면 창구 직원 바로 뒤에 ‘대리(代理)’라는 직책이 있다.

‘대리’란 남을 대신하여 일을 처리한다는 뜻도 있고 또 그런 사람을 일컫기도 한다.
우리가 평소 느끼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은행의 ‘대리’라는 자리의 막강함이다. 금액이 얼마가 되건 모든 일이 거기서 처리된다. 시간이 걸릴 일도 없다.

어느 조직이든 피라밑 체계로 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모든 일을 최상급기관에서 처리 할 수 없기 때문에 조직의 원활한 가동을 위해 권한을 위임하고 책임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문제는 누구나 권한은 가지려 하지만 책임은 피하려 한다는 데 있다.

우리 주변의 수많은 조직체 가운데 은행처럼 권한 분산과 책임 부여가 명확한 조직은 없어 보인다.
일반 행정 기관이나 학교도 조직 체계를 갖추고 있고 내부적으로는 전결과 대결등 ‘대리’ 체제 같은 것이 갖추어져 있긴 하다. 그러나 어느 ‘대리’도 은행의 ‘대리’만 은 못한 것 같다.

학교에도 은행과 같은 ‘대리’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왈 ‘교장 대리’라고나 할까.
‘교장 대리’는 물론 교실에서 교단에 선 교사들을 일컬음이다. 아이들이라는 ‘고객’을 상대로 인성과 지식과 체력과 사랑을 주고받는 숭고한 권한을 가진 대리 말이다.
학교장이 정한 교육방침이나 교육목표에 따라 그걸 전개하고 목표를 달성하도록 권한을 갖고 힘쓰는 그 교사들을 말한다.

학교장은 그 계획과 목표와 방법을 기획하고 조장해주는 권한과 책임을 갖고, 교실에선 선생님이 전권을 갖는다. 그 주어진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건 학교장과 교육행정기관들이 할 일이다. 다만 여기서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게 있다. 그건 바로 막강한 권한의 행사에 뒤따르는 ‘책임’이다.

학교장은 믿고 맡기고, 교단에 선 교사는 사명감 속에서 소신껏 가르치고, 아이들은 알차게 배우는 그런 시스템이라면 학부모들도 그저 바라만 보고 있거나 간섭만 하기보다는 동참하는 참여의 길로 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대리도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될 일이다.

아버지가 대통령이라고 해서 아들이 멋대로 ‘대통령 대리’를 해서도 안 되는 것이며, 남편이 장군이라고 해서 그 아내도 ‘장군같은 아내’여서는 안 된다.
분산되는 권한은 정당한 권한의 분산이고 위임이어야 한다. 주어지지 않은 권한을 멋대로 행세해서는 탈이 나게 마련이다.

월드컵 경기에서도 히딩크나 이을용, 황선홍이나 유상철 모두가 자기의 몫이 있었다. 모두가 자기 권한과 책임 하에서 이루어진다. 다만 과정이나 그 결과에 대해 상을 주기도 하고 벌을 받기도 하는 책임만이 있을 뿐이다.

지점장이 직접 고객을 상대할 수 없다. 학교장이 직접 아이들의 인성과 생활과 성적을 통제할 수도 없다.
지점장과 대리와 고객이 서로 믿고 움직이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듯이 학교장과 교사와 학부모, 학생이 서로 믿고 맡기고 자기 일에 자기가 책임지는 그런 시스템이 학교에도 필요할 것 같다. “학교에 무슨 미련이 그리 많으냐”고 애통해 하던 미망인.

그러나 은행대리 같은 마음으로 학교에 ‘미련’을 두었을 그 교감선생님은 애정이 깃든 학교를 한바퀴 돌고 난 뒤에야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삼가 고 노재현(盧在玹) 교감의 명복을 빈다.

/ 충북고 행정실장 idish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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