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 한국에 나와있던 미국 모 고위인사가 ‘한국인의 들쥐떼’성향을 언급했다가 우리국민들의 반발을 산 일이 있었다. 우리 국민들은 ‘자존심’을 상해 그 대사의 발언을 성토했지만 내심으론 “그런말 들어도 싸다”는 자성론도 결코 적지 않았다고 회고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우리기업의 ‘들쥐떼근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와 우리자신들을 다시한번 되돌아 보게했다.

정부의 규제위주 정책등을 따지며 재계의 목소리를 대변해온 박회장은 지난 12일 서울 포스코센터에서 있은 초청강사 특강을 통해 “얼마나 많은 기업들이 (어느사업이) 좋다는 소리만 있으면 들쥐떼처럼 한꺼번에 뛰어들어 망했느냐”면서 “기업들은 충분한 검토도 없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시장을 어지럽히는 관행에서 시급히 탈피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솔직히 말해 박회장이 이같은 지적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해도 우리 기업과 한국인의 ‘부끄러운 부정적 경쟁행태를 다시한번 들춰내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가 경청해야할 ‘약언’(藥言)이라 할 것이다.

국내에서는 물론 외국에 나가서 까지 누가 먼저 시작해 돈을 좀 벌었다 싶으면 너도 나도 그 업종에 뛰어들어 한국인끼리 사생결단식 경쟁을 벌임으로써 음해와 가격하락 등으로 인해 ‘공동으로 망하는 어리석은 사례’를 수없이 보아온 우리로서는 우리기업과 국민들이 우르르 몰려가고 몰려와 함께 피해를 양산하는 ‘한심한 행태’를 시급히 시정해야 선진기
업과 이성있는 국민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 하겠다.

‘들쥐떼근성’과 관련, 맹성(猛省)이 요청되고 있는 분야는 비단 경제계 뿐만이 아니다.

지역 정치분야에서도 절실한 ‘개선과제’로 거론되고 있고 농업분야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 나오고 있다. 특히 지역정치권에서의 ‘들쥐떼근성’은 최근 동시 다발적으로 도처에서 노출되고 있어 “저런 들쥐떼 같은 인물들에게 민선직책을 맡길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지역 정치권의 들쥐떼 근성 현상은 오는 6월의 지방선거와 12월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가히 만발(滿發)하고 있다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들쥐떼 유사군’과 ‘정치철새떼’들이 지역 곳곳에서 군무(群舞)를 추고 ‘권력’‘공천’‘당선’이란 이름의 먹이를 찾아 정신없이 몰려가고 당공천 불발시에는 불만을 토해내며 또다
시 당을 박차고 나오는 목불인견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이같은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이유는 주지하다시피 여권의 국정시행착오와 각종 게이트설 등으로 인한 민심이반으로 제일 야당이 자체노력 이상으로 반사적 지위상승이 이루어지고 그당의 우두머리가 12월 대선에서 승리, 청와대 입성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나자 ‘신정치권력’에 편승하기 위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길로 몰려가는 들쥐떼 유사 근성을 보이고 있다는 진단이다.

그런데 ‘새권력’을 창출 할 것으로 확신하고 달려간 당에서 공천을 받을 수 없거나 어렵게 되자 그 당을 탈당하거나 뛰쳐나오려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가 하면 요즘 중앙정치권이 요동치면서 ‘대세론’인가 뭔가가 추락할 기미까지 엿보이자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당을 뛰쳐나와 타당으로 향하려던 자치단체장 등이 발걸음을 멈춘채 정치기상도 판독에 온 신경을 쏟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정치들쥐떼근성’을 여기서 떠올리는 것은 권력과 명리 만을 쫓아 수시로 당적변경을 일삼는 중앙정치 지망생이나 지역의 지자체장 및 지방의원 지망생들의 버릇을 고치는 일은 지역의 주인인 유권자만이 해낼수 있고 그일이 지역민의 ‘중대한 정치적 책무’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변신, 변절등이 체질화된 인물은 정치적지도자나 지역의 일꾼으로 키워줄 인격적 요건을 상실했다고 평소에는 평가하고 있으면서도 막상 선거날이 닥쳐 투표할 때에는 학연, 지연, 혈연, 직연(職緣), 금연(金緣)등에 얽매여 ‘치매투표’를 반복한다면 ‘정치철새’나‘정치들쥐떼근성’행렬은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한국 정치현실 여건상 예기치 못한 정치상황 급변 탓으로 ‘정치적 변신’이 불가피한 상황에 처해있다 해도 그 선택은 그간 자신을 지지했던 유권자들에게 ‘속죄’하는 심정으로 ‘용서’를 빌며 이루어 져야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가변성이 크고 확증없는 ‘대세론’을 과신하여 ‘각주구검(刻舟求劍)’의 우(愚)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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